
산업계에 '노란봉투법'의 악몽이 재현되고 있다. 21대와 22대 국회 각 한 차례씩 모두 두 번이나 폐기됐던 법안이지만, 지난달 노동계와 진보진영을 중심으로 재발의됐다.
노란봉투법은 산업계가 격렬히 반대했던 법안 중 하나다. 기업에 간접 고용까지 책임을 확대하고, 불법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등의 내용이 문제로 지적되며 고용과 노동 시장의 경직성을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발 무역전쟁 위기에 직면한 우리 산업계 입장에선 밖으로는 무역장벽을 돌파하고, 안으로는 노동 관련 규제에 대처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을 수도 있게 된 셈이다.
고용과 노동의 경직성은 그동안 우리 산업계가 규제 개선과 관련해 지적해 온 단골 이슈 중 하나다. 첨단 기술의 속도전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산업, 일자리, 업무 형태에 맞는 다양한 고용의 자유도가 있어야 한다는 취지다. 그리고 세계 각국이 노골적인 보호무역에 나서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이 같은 요구는 더욱 커지고 있다.
최근 반도체 주도권 회복을 위해 국회에서 논의 중인 반도체특별법도 마찬가지다. 논란이 되는 주52시간 예외 적용 여부 또한 결국 노동 시장의 유연성과 연관돼 있다. 산업계 요구는 명확하다. 해외 경쟁사와의 치열한 경쟁 속에 집중적인 연구개발을 위해서 일부 예외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산업계의 바람과는 다르게 현재 국회에서의 법안 진행은 주52시간을 그대로 유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들여다보면 논란의 핵심은 52시간 준수 여부가 아니다. 주52시간이라는 원칙은 지키돼, 필요에 따라 노사 합의를 통해 집중적으로 더 일하고, 쉴 때는 쉬겠다는 '유연성'의 문제다. 하지만 반대 의견은 이러한 '유연성' 보다는 향후 '악용' 가능성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모든 법과 제도는 그 탄생 배경이 있다.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도 주52시간 의무를 담고 있는 '근로기준법'도 노동자의 권익과 안전을 지킨다는 숭고한 가치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시대상과 다양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변수를 외면하는 법과 제도들은 규제로 작동하게 된다.
글로벌 경쟁에서 특정 제도의 영향을 우리 기업만 받는 것은 분명 패널티다. 대한민국에만 존재하는 시장이라면, 우리만 가지고 있는 기술이고 독보적인 산업이라면 노란봉투법도 주52시간 일괄 적용도 가능할 것이다. 경쟁자가 없다면 한 번쯤은 적용해보고 문제가 생기면 되돌리면 될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하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거의 모든 주력 산업에 쟁쟁한 경쟁자들이 있고, 대한민국이 확실히 선두라 할 수 있는 분야도 없다. 후발주자인 중국의 추격 속도는 무서울 정도다. 기술 스팩과 발주 물량을 맞추지 못한다면 고객사가 선택할 수 있는 차선책은 얼마든지 있다. K-기업들이 주요 파트너가 아닌 '어중이떠중이' 취급받는 것은 시간문제다.
트럼프발 무역전쟁으로 글로벌 보호무역주의는 더 견고해지고 있다. 외교적 관례와 격식이 사라진 약육강식의 시대가 도래했다. 주요국들은 자신들의 산업과 기업을 지키기 위해 더 공격적인 지원과 보호장벽을 치고 있다. 미국은 세계 각국의 주요 기업들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
지금은 우리 산업의 위기이고 특수 상항이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정세에 맞춰가는 제도적 유연성이 필요한 때다. 산업계 바람처럼 더 잘해주지는 못하더라도 다른 곳과 같은 환경에서 경쟁할 수 있게는 해줘야 한다.
조정형 기자 jeni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