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는 지금 '에너지 대전환'의 거대한 길목에 서 있다. 새롭게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서해·남해·동해를 잇는 U자형 초고압 송전망, 이른바 '에너지 고속도로'를 국정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동시에 지역 단위의 분산형 전력망(마이크로그리드) 구축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두 전략은 본질적으로 충돌한다. 중앙집중식 거대 송전망을 깔면서 동시에 분산형 네트워크를 활성화한다는 것은 실제 투자와 제도 설계에서 심각한 모순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에너지 고속도로가 필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반도체 팹, 배터리 공장 같은 초대형 전력 소비처가 수도권과 산업벨트에 몰려 있다. 하루 수백㎽의 전력을 먹는 데이터센터를 지역 재생에너지로만 감당할 수는 없다. 결국 대규모 전력 생산지와 수요지를 연결하는 송전망 강화는 불가피하다. 지난주 부산에서 열린 '에너지슈퍼위크'에서 파티 비롤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은 “전력망 투자가 전력 수요 증가와 재생에너지 보급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에너지가 없으면 AI도 없다”며 강력하고 유연한 전력망이 곧 산업 경쟁력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문제는 그 방식과 부작용이다.
과거 육상 송전탑 건설 과정마다 지역 주민 반대가 극심했고, 수년씩 이어진 보상 협의 끝에 수천억원이 투입됐다. 이를 피하기 위해 이재명 정부는 국정과제에 해상 송전망 구상을 포함했다. 2030년까지 서해안을, 2040년까지는 남해와 동해까지 연결하는 U자형 해상 HVDC 송전망, 이른바 '에너지 고속도로' 구축 계획이다. 그러나 이는 '땅 위 갈등'을 '바다 위 갈등'으로 옮겨놓는 것일 뿐이다. 해저 케이블은 설치·유지 비용이 육상보다 몇 배 비싸고, 어민 반발과 해양 생태계 훼손 논란이 뒤따른다.
분산형 전력망은 에너지 고속도로와는 반대 선상에 있다. 태양광·풍력·연료전지·ESS 같은 소규모 자원을 AI 기반 플랫폼으로 묶어 지역 내에서 생산·소비하고 남는 전력을 인근 배전망과 공유하는 구조다. 이렇게 되면 중앙 송전에 의존하지 않고도 지역의 에너지 자립을 실현할 수 있다.
문제는 현 제도다. 지역에서 생산한 전기를 지역 주민에게 직접 파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반드시 중앙 계통을 거쳐야 거래가 이뤄진다. 송전 비용과 계통 보강비까지 더해지면 발전기업이 지역에 공급하는 것보다 에너지 고속도로 등을 통해 서울 등 수도권으로 보내는 편이 더 비싸게 팔 수 있는 구조다. 에너지 고속도로와 분산형 전력망을 동시 추진하는 정책의 모순이다.

정부 정책이 '말 따로 행동 따로'였던 것은 처음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을 외치면서도 체코·폴란드·사우디아라비아 원전 수출을 추진했다. 국내에서는 원전을 줄이겠다면서 해외에는 팔겠다는 이중적 태도는 국제 신뢰를 떨어뜨렸다. 윤석열 정부의 연구개발(R&D) 개혁도 마찬가지였다. '성과 중심' 개혁을 내세우며 예산을 대폭 삭감했지만, 결과는 연구 현장 위축과 과학기술·산업계의 반발이었다. 삭감됐던 R&D 예산은 다시 증액됐다. 이러한 정책 실패의 피해는 이를 추진했던 정치인이 아닌 국민과 산업계가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에너지 고속도로와 분산 전력망도 마찬가지다.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이 필수인 AI 시대에는 대규모 송전망, 즉 에너지 고속도로부터 우선돼야 한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데이터센터 비용의 70~80%가 전기”라고 지적했다. 또 질 좋은 전기의 안정적 공급이 반도체 생산에 필수라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분산형 전력망은 보완적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에너지 고속도로와 동시에 추진한다면 엇박자가 날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윤석열 정부의 R&D 개혁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모순 정책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시급한 것은 두 정책의 동시 추진이 아니다. 에너지 고속도로 구축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따르는 사회적 갈등과 비용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 먼저다.
안영국 기자 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