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연수 시절, 선의 경쟁을 펼치던 중국인 동료가 있었다. 연수를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간 그는 '천인계획' 일환으로 20억원 이상 연구 정착금을 받아 곧바로 고가 실험장비를 구축했다.
반면 한국으로 돌아온 나에게 주어진 연구 정착금은 그에 10분의 1에 불과해 같은 장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세계적인 연구에 도전하고 싶었고 나름 좋은 아이디어도 있었지만, 핵심 장비 하나 없이 어떻게 세계 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신진 연구자에 대한 지원은 조금씩 개선되고 있지만, 여전히 내가 겪었던 현실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언제까지 우리 신진 연구자들이 '헝그리 정신'만으로 버티며 경쟁해야 하는가.
우리 사회는 자원을 연차별로 배분하는 데 익숙하다. 경험이 많을수록 자원도 더 필요할 테니 나름 합리적인 철학일 수 있다.
그러나 신진 연구자가 막 독립된 연구를 시작하는 시점만큼은 달리 바라볼 필요가 있다. 바로 이 시점은 석·박사 과정과 박사후연구원 과정을 거치며 경험과 노하우를 쌓은 뒤,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아이디어에 본격적으로 도전하는 때다.
다시 말해 씨앗이 싹을 틔울 때 충분히 물을 주듯 이 시기를 맞은 신진 연구자에게는 연구 자원을 충분히 공급해야 한다. 그 투자가 결정짓는 초기 연구의 속도와 방향은 연구자 전체 경력의 궤적과 최종 도달 지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런 사실을 잘 알기에 미국과 유럽 등 과학 선진국에서는 신진 연구자 시기에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한정된 자원을 몰아주는 데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란 쉽지 않다. 그런 맥락에서 최근 발표된 2026년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의 과감한 증액은 반가운 소식이다.
전체 규모가 크게 늘었다. 특히 기존 2조9000억원에 머물던 기초연구 투자가 3조4000억원으로 약 15% 증가한 점이 눈에 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관하는 개인 기초연구 사업을 보면 리더연구와 핵심연구 지원을 상당히 확대하면서도, 신진연구는 과제 수 기준 약 35%가 늘어나 증가율이 가장 높았다. 작년과 올해 과제 수가 부족해 연구의 첫걸음조차 제대로 떼지 못했던 신진 연구자들이 간절히 기다려온 단비 같은 소식이다.
R&D 예산 증액 자체도 의미있지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예산을 적재적소에 쓰는 일이다. 정부가 연내 수립하겠다고 밝힌 '새정부 기초연구 진흥방안'의 내용이 중요한 이유다.
앞으로 나올 진흥방안에는 중장기적 관점에서 5~10년 뒤 신진 과학자로 성장할 세대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겼으면 한다. 젊은 세대가 공통 지적하는 바는 최근 이공계 인재의 해외 유출과 극단적인 의대 쏠림 현상의 궁극적 원인이 과학기술계 일자리의 매력 부족에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정부의 정책적 노력은 그동안 주로 신진연구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의 처우 개선에 머물렀다. 물론 이 시기 지원도 중요하지만, 젊은 세대들이 직업을 선택하고 도전을 결심할 때 더 크게 따지는 것은 정규 일자리에서 연구 환경과 성과에 따른 보상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과연 그들에게 과학자의 길을 선택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주고 있는가.
김근수 연세대 교수 keunsukim@yonsei.ac.kr
연세대 김근수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