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디지털 화폐 경쟁시대, 한국은?

박성호 한국인터넷기업협회장
박성호 한국인터넷기업협회장

지난 7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니어스법'으로 불리는 '미국 스테이블코인을 위한 국가 혁신 지도 및 설립법(GENIUS Act·Guiding and Establishing National Innovation for U.S. Stablecoins Act)'에 서명하며 스테이블코인이 제도권으로 공식 편입됐다.

이번 법안은 스테이블코인의 발행과 운용에 명확한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그동안 회색지대에 머물러 있던 디지털 자산을 제도권 금융의 틀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미국의 결정은 세계 금융시장에서 규제 방향을 제시하는 신호탄으로도 볼 수 있다.

미국이 이처럼 속도를 낸 배경에는, 달러 패권의 영속성을 디지털 시대에도 이어가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풀이된다. 그리고 스테이블코인을 '달러의 디지털 확장판'으로 규정하고, 글로벌 금융 인프라의 핵심 축으로 선점하려는 전략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2025년 보고서에서도 “미국의 '지니어스법' 제정은 디지털 자산시장의 글로벌 표준 선점과 함께 기술 및 금융경쟁 우위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으로,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시장 확대는 중장기적으로 미 달러화에 대한 의존도를 심화시켜 기존의 달러 패권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스테이블코인은 유럽, 싱가포르, 일본 등 주요국에서도 빠르게 제도권으로 편입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스테이블코인 법제화를 위한 논의가 본격화 되고 있으며, 현 정부의 국정과제에도 포함돼 있다.

한때 가상자산은 실물가치가 없는 투기나 사기로 여겨 이를 외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비트코인의 시가총액은 글로벌 주요 기업들과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다. 생각해 보면 사실 금 역시 치아의 보조재나 장식품 이상의 실질적 용도를 갖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는 결국 '신뢰' 때문이다.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화폐 가치도 결국은 그 제도에 대한 국민의 신뢰에서 비롯된다. 그런 점에서 가상자산에 대한 신뢰가 커지고 있는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렵다. 신뢰는 단순한 심리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이기 때문에 가상자산이 신뢰를 얻는다는 것은 기술이 제도를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졌음을 의미한다.

스테이블코인 의미·장점·작동 원리
스테이블코인 의미·장점·작동 원리

스테이블코인은 가치 변동성을 최소화한 분산원장 기술 기반의 가상화폐다. 가격 등락이 심한 기존 암호화폐와 달리, 일정한 가치를 유지하도록 설계되어 결제나 송금에 적합하다. 특히 국경을 넘어 거래가 이뤄질 때 기존 결제망보다 훨씬 낮은 수수료로 즉시 송금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예컨대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보급된다면 해외 소비자가 환전 절차 없이 원화로 'K콘텐츠'를 직접 결제할 수 있게 된다.

현재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테더(USDT)'와 '서클(USDC)' 등 달러 기반 코인이 사실상 장악하고 있다. 만약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세계 거래의 표준으로 자리 잡는다면, 이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달러 패권'으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가 원유나 원자재를 사거나 심지어 국내 결제에서도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고 통화주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물론 반대 의견도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국내에서 크게 쓰이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론, 혹은 자금세탁·탈세·외환규제 회피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우려다. 그러나 제도적 장치를 병행한다면, 이는 오히려 원화의 국제적 활용 범위를 넓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완벽함을 기하려다 기회를 놓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모든 제도에는 부작용이 따르지만, 이를 보완할 수 있다면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결국 스테이블코인 논의는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영역을 확보하느냐, 종속되느냐'의 문제다. 이미 세계는 현물에서 법정 화폐를 거쳐 디지털 화폐 시대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이미 중국은 달러 중심 금융 시스템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디지털 위안화 국제운영센터'를 설립하고 공식 운영을 시작했다. 또, 일본 역시 자국 최초의 엔화 연동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승인하고 곧 출시될 예정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글로벌 시장에서 통화 주권 경쟁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뒤처진다면 결제·금융 인프라 주도권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늦게 시작했지만, 빠른 추격과 혁신으로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했다. 플랫폼 산업에서도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전략으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자국 시장에서 미국 빅테크와 경쟁하는 몇 안 되는 나라가 되었다. 지금은 금융 산업 역시 미국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높은 디지털 인프라 수준과 빠른 기술 수용력, 그리고 글로벌 시장을 향한 개방성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기반은 스테이블코인과 같은 새로운 금융 질서 속에서 '따라잡기'가 아닌 '선도하기'를 가능하게 한다.

글로벌 시장에서 스테이블코인과 토큰화의 거대한 물결은 이미 시작됐다. 우리가 머뭇거릴수록 우리가 지불해야 할 기회비용은 커진다. 이제 따라가는 시대를 지나, 이끄는 시대로 나아갈 때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와 국회, 그리고 민간 금융기관의 선제적인 협력이 필수적이다. 규제는 혁신을 억압하는 족쇄가 아니라, 건강한 성장을 유도하는 안전장치로 작용해야 한다. 낡은 규제를 과감히 걷어내고, 스테이블코인 발행 주체와 자산 담보 기준, 소비자 보호 장치 등을 국제적 표준에 맞춰 신속히 마련해야 한다.

예컨대 한국형 스테이블코인이 콘텐츠 산업, 해외 결제, 교포 송금 등에 활용된다면 우리산업에 대한 글로벌 소비의 편의성과 확장성도 더욱 커질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새로운 기술의 예측 불가능성이라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를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수단과 전략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할 것이다.

박성호 한국인터넷기업협회 회장 shpark@kinternet.org

〈필자〉박성호 한국인터넷기업협회 회장은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국민대에서 법학 석사, 가톨릭대에서 조직상담학 석사를 취득했다. 네이버에서 대외협력실장으로 근무했다. 이후 컴투스, 게임빌 법무총괄 이사로 지냈다. 2018년 한국인터넷기업협회 사무총장으로 취임했다. 현재 한국저작권위원회 위원, 방송통신위원회 규제심사위원,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가지식정보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1년 한국인터넷기업협회 회장으로 취임한 후 규제 완화, 글로벌 사업자의 시장 지배력 남용 억제, 인터넷 플랫폼 활성화 도모 등 국내 인터넷산업의 선순환 생태계 안정화에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