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국내 금융 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 가운데 하나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이다. 통화 질서와 제도 설계를 둘러싸고 우려와 기대가 교차했다. 그러나 시선을 글로벌 시장으로 옮기면, 논의의 초점은 달라진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이 결제와 정산의 기준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 중이다.
결제의 기준은 단순한 편의 수단이 아니다. 그 기준을 먼저 차지하는 쪽이, 그 위에서 작동하는 금융 질서 형성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중심에는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있다. 테더(USDT)와 서클의 USDC가 전체 총액의 약 85~90%를 차지하며, 2600억달러를 넘어선다. 이 규모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시가총액이 아니다. 디지털자산 거래와 국경 간 송금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며, 결제와 정산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스테이블코인은 금융 인프라의 문제로 다뤄지기 시작한다.
여기에 결정적인 변화가 더해졌다. 올해 7월 미국에서 지니어스법(GENIUS Act)이 제정된 이후, 핀테크 기업과 금융기관이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직접 나서는 사례가 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관심의 초점도 발행 가능성이나 허용 여부가 아니라, 어떤 구조로 사업 모델을 설계할 것인가로 이동하고 있다.
USDT는 이 시장이 어떤 경로로 성장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제도적 기준이 마련되기 전, 디지털자산 거래 수요를 바탕으로 가장 먼저 확산한 스테이블코인이다. 그 과정에서 준비금의 투명성, 책임의 귀속, 사고 발생 시 대응 체계와 같은 쟁점이 뒤늦게 제기됐다. 실제 사용에서는 통화에 준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제도적 틀과의 정합성은 아직 완전히 맞춰지지 않은 상태다. 성장의 경로와 제도 설계의 시점이 엇갈리면서 드러난 한계라고 볼 수 있다.
페이팔이 발행한 PYUSD는 스테이블코인을 다루는 방식부터 달랐다. 페이팔은 자신이 운영하는 결제 네트워크 위에서 직접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했고, 이를 기존 소비자 보호 체계와 결합했다. 분쟁 조정과 책임 판단은 이미 구축해 온 절차에 따른다. 결제 과정에서 블록체인은 사용자 경험의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결제 기업이 발행자일 때 가능한 선택이며, 제도권으로 들어가는 경로를 처음부터 설계한 사례다.
이제 우리의 위치를 돌아볼 차례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모바일 결제 인프라를 갖춘 나라다. 그럼에도 최근 몇 개월간 이어진 스테이블코인 논의는 발행 주체와 감독 권한, 제도적 책임을 둘러싼 조율에 머물며 뚜렷한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반면, 글로벌 시장에서는 결제와 정산의 표준을 둘러싼 경쟁이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 이 흐름에서 선택이 늦어질수록, 기준을 스스로 설계하기보다 외부에서 만들어진 표준을 받아들이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문제는 남은 시간이 얼마냐가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선택지가 넓어지는 구조가 아니라는 점이다. 스테이블코인은 플랫폼 안에서 가격이 표시되고 거래가 정산되는 기준으로 작동한다. 글로벌 플랫폼과 결제망에서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이런 기준으로 자리 잡을수록, 원화의 활용 범위에도 구조적 제약이 발생할 수 있다. 이는 통화 주권을 둘러싼 이론적 논쟁이 아니라, 기업과 소비자가 어떤 단위로 가격을 인식하고 거래를 결정하느냐의 문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선택이 중요하다. 글로벌 경쟁에서 속도는 이미 기본 조건이 되었고, 동시에 설계 없이 앞서간 선택이 금융 시스템에 어떤 부담을 남기는지도 확인되고 있다. USDT와 PYUSD 사례가 이를 보여준다. 그동안 충분한 논의와 숙고의 시간을 거친 만큼, 이제는 정책 당국이 더 정교한 설계와 분명한 결단으로 답할 차례다.
송민택 한양대 경영전문대학원 겸임교수 pascalsong@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