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세계는 의료AX 전쟁…'K디지털 헬스' 플랫폼 국가로 가는 길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대변되는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NHS)는 '보편적 의료서비스와 무상의료' 원칙으로 전 세계 공공의료의 이상적 모델로 여겨졌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NHS는 인구 고령화와 재정 압박, 의료진 부족이라는 전례 없는 파도 앞에 존립 위기를 맞았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영국이 승부수를 꺼내들었다. 바로 '디지털 대전환'이다.

그들은 단순히 병원의 차트를 디지털로 옮기는 수준을 넘어 국가 전체의 보건의료 정보를 하나로 묶는 거대한 디지털 신경망인 'NHS SPINE'을 구축했다. 환자가 어느 병원을 가든 과거의 기록이 끊김없이 흐르고, 3000만명이 넘는 영국인이 'NHS APP'이라는 단일 창구로 자신의 건강권을 직접 통제한다. 여기에 50만명의 유전체·건강 데이터를 모아 연구에 활용하는 모습은 가히 '의료계의 2차 산업혁명'이라 부를 만하다.

이러한 변화는 영국만의 결단이 아니다. 지금 세계는 보건의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거대한 전쟁터와 같은 모습이다. 핀란드는 '칸타(Kanta)' 플랫폼 구축과 법제화를 통해 모든 의료기관이 데이터를 칸타에 저장하도록 의무화하는 동시에 국민의 정보 접근권을 보장하며 단순한 진료 연계를 넘어 데이터의 2차 활용이 가능한 혁신 생태계를 완성했다.

미국은 '에픽(Epic Systems)'과 같은 거대 민간 기업들이 압도적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시장 중심의 디지털 생태계를 확장하며 전 세계 의료 표준을 선점하려 달려들고 있다. 디지털 헬스 인프라는 이제 한 국가의 복지 수준을 넘어 인공지능전환(AX) 시대 국가 경쟁력을 결정짓는 핵심 전략 자산이다.

세계 주요국 대국민 디지털 보건의료 서비스 비교
세계 주요국 대국민 디지털 보건의료 서비스 비교

우리나라 역시 '공공 디지털 헬스 플랫폼 국가'로의 도약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한국보건의료정보원은 보건의료 데이터의 표준화를 비롯해 디지털 헬스 실현에 필요한 다양한 공공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다.

영국에 NHS SPINE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진료정보교류시스템'이 있다.

진료정보교류 시스템은 전국 병의원을 잇는 의료기관 간 데이터 교류망으로, 의료 연속성을 보장하고 중복 검사를 방지하는 토대가 된다. 현재 전국 1만200개 의료기관이 연동되어 있으며 연간 140만건 진료정보와 의료영상이 교류되고 있다.

개인은 의료 마이데이터 플랫폼인 '건강정보 고속도로 플랫폼'으로 의료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다.

보건의료 분야 최초 개인정보관리 중계전문기관으로 지정된 한국보건의료정보원은 건강정보고속도로 플랫폼을 이용해 공공기관과 의료기관이 보유한 건강 데이터를 본인 동의 기반으로 원하는 곳에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전송할 수 있도록 지원해 개인의 의료 데이터 주권을 보장한다.

건강정보고속도로에는 현재 47개 상급종합병원을 포함해 전국 1329개 의료기관이 참여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국민은 누구나 건강정보고속도로를 타고 흐르는 고품질의 데이터를 대국민 창구인 '나의건강기록' 애플리케이션(앱)에서 활용할 수 있다.

나의건강기록 앱에서는 진료기록, 투약 정보, 건강검진, 예방접종 내역 등 자신의 건강 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 나의건강기록은 19세 미만 자녀의 건강정보 조회, 약물 알레르기 정보 조회, 복약알림, 예방접종 알림 등 부가 기능을 꾸준히 고도화했다. 이는 NHS APP이 지향하는 '디지털 전면 창구(Front Door)'와 궤를 같이한다.

한국보건의료정보원은 진료정보교류시스템과 건강정보 고속도로를 하나로 합친 (가칭)디지털 의료정보교류시스템 구축을 위해 2월부터 업무 프로세스 재설계·정보전략계획(BPR·ISP)에 돌입할 예정이다.

이 시스템이 구축되면 국민 개인의 의료정보 관리와 진료기록 전송 등이 한결 수월해진다. 인공지능(AI)을 접목해 개인 예방 중심 건강관리도 지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건강정보 고속도로 데이터 흐름도
건강정보 고속도로 데이터 흐름도

디지털 헬스케어의 종착지는 결국 '정밀 의료'(Precision Medicine)와 '신약 개발'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은 임상 데이터와 유전체 데이터를 결합한 거대 데이터셋, 즉 '바이오 빅데이터'이다.

50만명 이상의 유전체 정보를 모아 UK 바이오뱅크를 구축한 영국은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해왔다. UK 바이오뱅크는 전 세계 연구자들에게 개방되어 수만 건의 혁신적인 연구 결과를 산출했고, 영국의 바이오 산업 경쟁력을 지탱하는 핵심 자산이 되었다.

핀란드도 핀젠(FinnGen) 프로젝트로 50만명의 유전체 정보를 확보했으며, 미국은 올오브어스(All of Us) 프로젝트를 통해 100만명을 목표로 빅데이터를 구축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에 맞서 '국가통합바이오빅데이터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다. 2029년까지 개인정보 제공에 동의한 100만명의 임상 정보, 유전체 정보, 라이프로그를 수집·분석하는 이 프로젝트는 대한민국 보건의료 역사의 판도를 바꿀 게임 체인저다.

이는 단순한 데이터 수집을 넘어 한국인 특성에 맞는 질병 예측 모델을 만들고 개인 맞춤형 정밀의료를 지원하며, 희귀·난치병 치료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국가적 전략 자산'을 구축하는 작업이다. 올 하반기부터는 데이터를 단계적으로 개방해 연구개발(R&D)에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다.

또 우리나라는 단일 건강보험 체계와 높은 전자의무기록(EMR) 보급률을 바탕으로 전 세계 유례없는 전 국민 보건의료 빅데이터를 구축하고 있다. 보건의료 빅데이터 플랫폼은 10개 기관의 공공데이터와 6개 국립병원이 임상 데이터를 연계해 통합 연구 환경을 제공한다.

개별 의료기관에 분산된 임상 데이터 활용을 위한 플랫폼도 있다. '의료데이터 중심병원' 사업은 병원이 보유한 임상 데이터를 표준화·규격화해 연구에 안전하게 활용하도록 지원하며 'K-CURE 네트워크'는 암 임상 데이터와 암 공공 데이터를 결합하고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이 원활히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바로 정책적 기반 마련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개인의 데이터 전송요구권이나 가명정보의 산업적 활용 범위에 대해 여전히 논란과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핀란드가 개인정보보호법(GDPR)이 있음에도 바이오뱅크법을 개정하고 데이터의 2차 활용법을 제정해 혁신 생태계를 만든 것처럼 우리나라도 '디지털 헬스케어법'을 조속히 제정해 데이터의 안전한 활용과 철저한 정보보호 사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연구자들이 법적 부담 없이 안심하고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빅데이터의 가치가 살아난다.

우리가 그리는 보건의료의 미래는 단순히 기술적인 진보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국민 개개인의 삶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체감형 복지'의 완성이다. 환자 중심의 맞춤형 의료 서비스는 일상이 될 것이다. AI 가 환자의 건강 상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이상 징후를 포착해 알려주는 시대가 열린다.

국가 차원의 성장 동력도 마련될 것이다. 보건의료 데이터는 의료 AX 시대의 가장 귀중한 자산이다. 탄탄한 디지털 인프라 위에서 우리 기업들이 세계적인 의료 AI 솔루션을 개발하고 신약을 개발한다면, 디지털 헬스케어는 포스트 반도체 시대의 새로운 먹거리가 될 것이다.

염민섭 한국보건의료정보원장
염민섭 한국보건의료정보원장

염민섭 한국보건의료정보원장

39회 행정고시를 통해 공직에 입문했다. 보건복지부에서 정신건강정책관, 장애인정책국장, 노인정책관 등 주요 보직을 거쳤다. 2024년 7월 한국보건의료정보원장으로 임명되어 보건의료 분야 전문성을 바탕으로 데이터의 표준화와 안전한 활용을 통한 의료 서비스 질 향상과 국민 건강 증진에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