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 중세의 긴 어둠을 깨고 '인간'이라는 가치가 다시 무대 중심에 섰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예술을 빚었고, 미켈란젤로는 차가운 대리석에서 인간의 뜨거운 근육을 찾아냈다. 르네상스는 단순한 예술 사조가 아니었다. 그것은 과학과 예술, 그리고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 결합해 인류의 라이프스타일을 송두리째 바꾼 '융합의 폭발'이었다.
2026년 오늘, 우리는 또 다른 의미의 르네상스를 목도하고 있다. 바로 인공지능(AI)이 공기처럼 편재하는 'AI 전환(AX) 시대'다. 하지만 여전히 연구개발(R&D)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실험실의 숫자만을 떠올리곤 한다. 지금 서울이 그리는 R&D는 달라야 한다. 피렌체의 예술가들이 그러했듯, 이제 기술은 실험실을 벗어나 시민의 일상, 즉 '라이프스타일'을 조각하는 도구가 돼야 한다.
◇르네상스의 심장, 메디치가(家)의 마중물: 대한민국 R&D의 정점에서 서울이 걷는 길
15세기 피렌체의 르네상스가 꽃필 수 있었던 것은 로렌초 데 메디치를 필두로 한 메디치 가문의 전폭적인 후원 덕분이었다. 그들은 당장의 경제적 이익을 따지기보다 인류의 가능성에 베팅했고, 그 자본의 마중물은 인류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2026년 서울의 기술 혁신 역시 이러한 '전략적 후원'의 힘으로 새로운 르네상스를 준비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글로벌 R&D 강국이다. 2024년 우리나라 총 연구개발비는 131조462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대비 10.1% 증가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비중은 5.13%로,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2위라는 압도적인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국가적 규모의 팽창 속에서 서울형 R&D는 양적 팽창을 넘어선 '질적 전환'의 표본을 제시한다. 2005년 첫발을 뗀 서울형 R&D 지원사업은 2026년 올해는 최근 5년 내 최대 규모인 425억원의 예산을 편성하며 지원의 폭을 넓히는 공격적인 행보를 택했다.
단순히 자본만 모인 것이 아니다. 기술은 사람의 일자리를 뺏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의 영토를 넓혔다. 서울형 R&D는 5년간 누적 6035명의 신규 고용을 창출하며 서울 경제의 가장 활기찬 고용 엔진으로 자리매김했다. 5389억원에 달하는 누적 매출액과 16개사에 달하는 코스닥 상장(IPO) 성공 사례는 서울의 스타트업들이 실제 경제의 혈맥을 돌게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울형 R&D, AX 시대에 내린 결단
2026년 서울은 글로벌 AI 기술 경쟁의 승부처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 더욱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올해 선발 예정인 195개 과제 중 절반 이상을 AI 및 AI 융합기술(AI+X)에 집중한다. AI R&D 예산은 지난해 50억원에서 70억원으로 확대했다. 이는 서울을 전 세계 AI 혁신의 심장부로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통합선발제'의 도입이다.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가 재능 있는 예술가라면 분야를 가리지 않고 후원했듯, 이 제도는 분야별 예산 한도 때문에 아쉽게 탈락했던 고득점 혁신 과제들을 구제하여, 기술의 파급력만 있다면 우선 선발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혁명적인 제도다. 또 연구자의 자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건비 현금 계상 100% 적용 대상을 확대했다. 이는 창조적 인재를 확보하는 것이 곧 R&D의 성공임을 간파한 서울의 인사이트다.

◇기술에 온기를 입히는 서울의 실험: 실증의 르네상스
서울형 R&D는 기술에 '인문학적 온기'를 입히고 있다. 20억원 규모의 '약자 및 돌봄 로봇 기술개발' 사업은 수요층이 협소해 외면받기 쉬운 기술을 공공이 마중물이 되어 끌어올리는 르네상스적 포용성의 상징이다. 복지관과 요양시설에서 시민이 직접 참여해 기술을 다듬는 과정은, 기술이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는지 증명하는 따뜻한 사례가 될 것이다.
혁신의 완성은 현장에서 이뤄진다. 올해 출범하는 '테스트베드 서울 실증센터'는 기업의 수요를 상시 접수해 실증 매칭부터 사업화까지 원스톱으로 지원하며 혁신의 가속도를 높인다. 총 86억원 규모의 실증 지원(서울 테스트베드)은 혁신의 싹이 거목으로 자라게 하는 든든한 토양이 될 것이다. 특히 규제라는 암초에 부딪혀 공들인 기술이 사장되지 않도록 '사전 규제 스크리닝 제도'를 도입, 기술의 생존력을 근본적으로 보강했다.
이제 서울의 기술은 거침없이 국경을 넘는다. 북미와 유럽을 아우르는 글로벌 실증 네트워크는 세계 곳곳을 서울 기업의 무대로 만들 것이며, CES 최고혁신상과 같은 성과들이 그 여정을 뒷받침할 것이다. 서울은 이제 전 세계 스타트업이 자신의 기술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매력적인 '혁신 아고라'로 거듭나고 있다.
◇기술의 완성은 '시민의 행복'에 있다
스티브 잡스는 생전 “기술은 인문학의 교차로에 서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형 R&D가 지향하는 종착역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수천억원의 자본을 움직이고 AI와 로봇, 우주와 양자 등을 논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단 하나다. 바로 '서울 시민의 삶이 어제보다 오늘 더 편리하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2026년 서울형 R&D는 기업에는 성장의 사다리를, 시민에게는 혁신의 혜택을 제공하는 거대한 플랫폼이 될 것이다. 이제 서울은 차가운 숫자가 지배하는 도시가 아니라, 그 숫자가 빚어낸 따뜻한 기술이 시민의 라이프스타일을 조각하는 '혁신의 수도'로 거듭날 것이다. 기술의 르네상스는 이미 시작됐다. 그 무대는 바로 우리가 걷고 숨 쉬는 이곳, 서울이다.
김현우 서울경제진흥원 대표 hwood@sba.soul.kr

〈필자〉 1991년 한국장기신용은행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외국계 은행 HSBC를 거쳐, IT 창업 붐 속에서 벤처캐피털 보스톤창업투자를 설립해 대표로 활동했다. 2000년대 중반 셀트리온에 투자해 주목받았으며, 영화 '괴물' '해운대' 등 200편 이상의 콘텐츠 투자로 영역을 넓혔고, 2017년 아시아경제TV 대표로 취임해 블록체인·비트코인 시황을 경제매체 최초로 방송했다. 2021년 11월 서울경제진흥원 대표로 부임해 서울콘, CES, 미래혁신단·뷰티본부 신설 등 공공 혁신을 이끌고 있다. 2007년 대통령 표창, 2024년 산업포장, 2025년 국가브랜드대상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