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 “벤처·스타트업 근로시간, '총량 규제'에서 성과 중심 재설계로 바꿔야”

벤처·스타트업의 근로시간 문제를 더 이상 '총량 규제'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전문가 진단이 나왔다. 노동시간 단축이 아니라 성과와 몰입 중심으로 일하는 방식 자체를 재설계하고, 이를 뒷받침할 특별연장근로, 유연근로제, AI 활용 등 대안적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중소벤처기업연구원은 5일 서울 여의도 글래드 호텔에서 '2026년 제1차 KOSI 심포지엄'을 열고 '벤처·스타트업 근로시간 혁신' 정책 방향을 논의했다. 이번 심포지엄은 노동정책 환경 변화 속에서 벤처·스타트업의 성장 단계와 업무 특성에 맞는 근로시간 운영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됐다.

주제발표를 맡은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실장은 한국의 근로시간·생산성 구조를 근본적 한계로 진단했다. 그는 “한국 임금근로자의 연평균 근로시간은 OECD 국가 중 6위인 반면,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31위에 그친다”며 “선진국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노동집약적 경제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라고 말했다. 이어 “근로시간 단축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며 “생산성 구조 전환을 통해 성장 잠재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5일 서울 여의도 글래드 호텔에서 열린 '2026년 제1차 KOSI 심포지엄'에서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실장이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5일 서울 여의도 글래드 호텔에서 열린 '2026년 제1차 KOSI 심포지엄'에서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실장이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노 실장은 중소기업 근로시간 구조의 이중성도 짚었다. 300인 미만 중소기업 임금근로자 가운데 34시간 이하 단시간 근로 비중은 27.8%, 53시간 이상 장시간 근로 비중은 5.7%로, 모두 대기업보다 높은 수준이다. 반면 중소기업 임금근로자 중 상용근로자 비중은 2015년 61.6%에서 2025년 71.0%로 10년 새 9.4%p 증가했다. 그는 “상용근로자 비중이 확대된 상황에서 획일적인 근로시간 단축은 현장 체감 난도가 매우 높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노 실장은 벤처·스타트업의 성장 특성을 반영한 정책 과제로 △AI·스타트업 R&D 분야 특별연장근로 허용 △선택적 근로시간제 활용기간 확대 △투명한 근로시간 기록·관리 기반의 노사 선택권 확대 △중소기업 AI 전환 지원 강화 △노·사·정 협력을 통한 성과보상 시스템 확산 등을 제시했다.

종합토론에서도 근로시간을 '규제'가 아닌 '성과와 몰입' 중심으로 재설계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이어졌다. 박환수 한국SW·ICT총연합회 사무총장은 “AI·SW·R&D 직무는 몰입과 연속적 사고가 핵심”이라며 “근로시간 총량 규제에서 벗어나 프로젝트 단위 운영으로 전환하고, 근태·성과관리 도구와 AI 전환, 교육을 묶은 통합 지원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현장 사례도 소개됐다. 최대우 애자일소다 대표이사는 “AI 기반 업무 자동화와 내부 에이전틱 전환을 통해 노동시간은 줄이고 생산성은 높이는 방향으로 일하는 방식을 재설계하고 있다”며 “벤처·스타트업이 먼저 실험하고 성과를 공유하는 과정이 생태계 전반의 혁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유연한 제도 설계와 안전장치의 병행을 주문했다. 안준모 고려대 교수는 “노동생산성 제고를 위한 정책적 지원과 적절한 보상이 전제된다면 탄력적인 근로조건 설계도 가능하다”며 “특히 AI·첨단기술 분야는 시장 선점을 위한 고강도 경쟁 현실을 감안한 유연한 노동여건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정부도 현장 논의를 정책에 적극 반영하겠다는 입장이다. 박용순 중소벤처기업부 중소기업정책실장은 “관점의 차이를 잘 극복해 근로자와 기업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개선방안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업계의 지속적인 정책 제언을 당부했다.

성현희 기자 sungh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