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AI 전환 시대 새로운 상거래 질서:UNCITRAL 자동화 계약 모델법

최경진 가천대 교수
최경진 가천대 교수

인류는 단순한 디지털화를 넘어 인공지능(AI)이 산업과 일상 전반을 재편하는 AI 전환(AX)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과거 기술 혁신이 노동을 대체하거나 의사를 전달하는 매체 발전에 집중됐다면, 오늘날 AI 기술은 인간의 인지적 판단과 의사결정 과정 자체를 기계에 위임하는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을 야기한다. 이러한 진보는 디지털 경제 확산과 맞물려 글로벌 상거래 양상을 비약적으로 변화시키며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그러나 눈부신 기술 발전 이면에는 이를 안정적으로 뒷받침할 견고한 법·제도적 인프라가 필수다. 기술로 형성된 권리·의무 관계가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한다면 상업적 예측 가능성이 무너져 혁신 동력도 상실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수년간 유엔 국제상거래법위원회(UNCITRAL) 제4실무작업반에 대한민국 정부대표로 참여하며, 거대한 기술적 변화를 법적 규범으로 포섭하려는 국제사회의 치열한 논의를 최일선에서 목도했다. 심도 있는 법리적 탐구 끝에 UNCITRAL은 2024년 '자동화 계약 모델법(MLAC)'을 채택하는 역사적 성과를 이뤄냈다. 이 모델법은 인간 중심의 계약 관행을 뛰어넘어, 기계가 스스로 판단하고 실행하는 거래의 법적 효력을 국제적으로 포괄적이고 명시적으로 승인한 기념비적 규범이다. 과거 전자상거래 모델법이 종이 없는 시대의 서막을 열며 우리 법제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듯, 이번 모델법 역시 AI 경제 시대에 우리 법이 나아가야 할 이정표가 될 것이다. 이에 모델법의 핵심 철학과 내용을 소개하고 우리나라 법·제도 선진화를 위한 화두를 던지고자 한다.

◇계약 패러다임의 진화와 전통적 법리의 한계

전통적인 사법(私法) 체계와 계약법의 근간인 사적 자치의 원칙은 이성을 가진 인간의 진정한 의사에 기초한 법률행위만을 전제로 발전해왔다. 1990년대 이후 등장한 전자상거래 역시 획기적 변화였으나, 법리적으로는 인간의 구체적 지시와 의사를 전자적 매체를 통해 전달하는 것에 불과했다. 과거 전자상거래 모델법이나 전자계약협약이 '기술 중립성', 전자적 형태의 '비차별 원칙'과 종이 문서와 '기능적 등가성' 확립에 주력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때까지 계약 주체는 명확히 인간이었고 기계는 훌륭한 전달자였다.

그러나 AI기술 고도화는 이 전제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초기 자동화가 동일한 입력에 동일한 결과를 내는 결정론적 시스템에 의존했다면, 오늘날 상거래에는 데이터 학습으로 스스로 판단 기준을 수립·진화시키는 비결정론적 알고리즘이 확산되고 있다. 이들은 인간의 즉각적 개입 없이 독자적으로 거래 상대를 탐색하고 계약을 체결한다. 나아가 블록체인 기반 스마트 계약 확산은 조건 합의를 넘어 코드가 스스로 급부를 실행하는 이행의 자동화 단계까지 현실화시켰다.

이처럼 당사자와 계약적 행위 사이에 발생하는 '단절'은 심각한 규범적 공백을 야기한다. 인간의 의사가 결여된 채 기계가 도출한 결과를 누구의 의사표시로 볼 것인지, AI 블랙박스 현상으로 알고리즘이 예측 불가능한 기행을 저질렀을 때 책임을 어떻게 귀속시킬 것인지 현행 민법의 해석론으로는 명확한 해답을 내리기 어렵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규범 공백을 해소하고 법적 확실성을 담보할 새로운 국제 규범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최경진 교수
ⓒ최경진 교수

◇자동화 계약 모델법 기본 철학과 도구적 관점

자동화 계약 모델법(MLAC)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법철학은 '기술 중립성'과 AI를 바라보는 '도구'적 관점이다. 법률은 급변하는 기술 속도를 앞지를 수 없기 때문에 MLAC는 특정 기술 용어에 종속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대신 결정론적이든 비결정론적이든 자연인의 개입 없이 행위를 수행하는 모든 정보처리시스템을 '자동화된 시스템'으로 포괄 정의, 미래 신기술까지 유연하게 포섭할 규범적 탄력성을 확보했다. 특히 기계의 자율성을 법적으로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가 가장 치열한 쟁점이었다. AI에 제한적 법인격을 부여하자는 주장도 제기됐으나 자동화된 시스템은 아무리 복잡한 연산을 수행해도 궁극적으로 인간의 목적 달성을 위한 정교한 '도구(tool)'에 불과하다는 인본주의적 합의가 도출됐다. 시스템 자체의 독립적 의지나 법인격을 부정하고, 기계 산출물에 대한 모든 법적 책임과 효과는 이를 활용하는 배후의 인간에 철저히 귀속돼야 함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는 사법 체계의 근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결단이었다. UNCITRAL 규범이 일관되게 유지해온 '비차별 원칙'을 계승, 인적 개입 부재에 대한 비차별을 선언했고 나아가 규율의 초점을 자동화된 시스템의 이용으로 전환하며 계약 이행 단계로까지 적용범위를 확장하였다.

◇계약의 유효성 승인과 예상치 못한 행위 규율

이상과 같은 철학 위에서 MLAC는 세 가지 핵심 실체 규정을 제시한다. 첫째, 자동화된 계약의 포괄적 법적 유효성 승인이다. 자연인의 개입 없이 형성된 계약이라도 자동화를 이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유효성이 부인돼서는 안된다고 천명한다. 이는 규범을 진일보시켜 계약 성립뿐 아니라 컴퓨터 코드에 의한 자기집행적 이행단계, 동적 정보를 이용한 실시간 조건 변경 과정까지 모두 법적 보호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코드가 계약 조건이 될 수 있음을 승인해 스마트 계약을 포함한 자동화 계약 전반의 법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둘째, 자동화된 행위의 주체 확정과 귀속(Attribution) 메커니즘이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은 행위에 대해 당사자 간 사전 합의를 우선하되, 합의가 부재하면 '해당 목적을 위해 시스템을 이용하는 자'에 효과를 귀속시키는 기준을 제시했다. 단순 기술적 운영자가 아니라 시스템을 상업적 수단으로 채택해 경제적 편익을 향유하는 실질적 주체가 책임을 지는 '이용자 책임의 원칙'을 확립했다. 복잡한 AI 기반 산업 생태계에서 당사자를 명확히 식별하게 해주는 실효성 있는 규정이다.

셋째, 가장 논쟁적이었던 이른바 '예상치 못한 행위'에 대한 규율이다. 비결정론적 알고리즘은 정상 작동 중에도 학습 편향성 등으로 이용자가 상상하지 못한 결과를 도출할 위험이 있다. 이용자가 진의와 다르다며 귀속을 부정하려 할 수 있는데 모델법은 결과가 예상치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귀속 자체를 원칙적으로 부인할 수 없도록 해 무분별한 책임 회피를 차단했다. 다만 당사자가 합리적으로 예견할 수 없었고 상대방도 악의나 중과실 등으로 비정상성을 충분히 알 수 있었던 상황이라면 예외적으로 계약 효력을 배척할 수 있는 정교한 조화점을 제시했다.

ⓒ최경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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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스탠더드 부합 위한 법·제도 선진화

새로운 국제 상거래 규범이 완성됨에 따라 이를 국내법 체계에 어떻게 스며들게 할 것인가가 과제로 남았다. 최고 수준의 IT 인프라와 역동적 산업 생태계를 보유한 우리나라는 AI 플랫폼의 해외 진출과 무역 업계의 거래 비용 절감을 위해 글로벌 스탠더드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인간의 내심적 의사 합치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민법이나 정보처리시스템을 수동적 매체로만 상정하는 현행 '전자문서 및 전자거래 기본법'으로는 고도로 자율화된 비결정론적 AI의 행위를 온전히 포섭하고 규율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MLAC를 우리 법제에 안착시키려면 다양한 방안이 가능하지만, 무분별한 특별법 제정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 우리 법제체계 내에서 조화로운 수용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국가 차원 AI 기반 거래 인프라 신뢰체계 구축과 연계된 입법 전략이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기존 전자문서 및 전자거래 기본법을 정교하게 보충·수정하는 입법 접근을 하나의 유용한 방안으로 고려해볼 수 있다. 자동화 시스템 정의를 신설해 기술 중립성을 확보하면서도 비결정론적 방식을 아우르고, 행위의 법적 유효성 승인 및 귀속 주체를 명확히 하는 조항을 신설하는 것이다. 다만 시스템 오류로 인한 위험 분배 문제는 민법의 착오 취소 법리와 유기적으로 조화시키는 등 명시적 입법과 기존 해석론을 결합하는 '하이브리드 방식'의 복합적이고 세련된 접근법이 요구된다.

◇AI 시대 주도권은 견고한 법적 인프라서 시작

자동화 계약은 먼 미래의 공상과학이 아니라 이미 글로벌 시장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엄연한 현실이다. 법·제도가 기술 속도를 핑계로 침묵한다면 그에 따른 법적 리스크와 예측 불가능성은 고스란히 기업과 국민의 막대한 비용으로 전가될 것이다. 국제 무역을 기반으로 성장해 온 대한민국이 글로벌 AI 경제 주도권을 확보하려면 그에 걸맞은 법적 기반 확충이 필수다.

MLAC는 사법적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 인간 중심의 책임 원칙을 유지하면서 눈부신 기술 혁신을 포용하는 글로벌 공통 규범이다. 이제 그 공은 국내 정부, 국회, 산업계로 넘어왔다. 선제적으로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거래의 룰을 세팅하고 법적 안정성을 확보할 때, 대한민국의 AI 혁신 생태계는 지속 발전할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기술의 진보를 감당할 견고하고 유연한 법적 그릇을 빚어내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최경진 가천대 법학과 교수 kjchoi@gachon.ac.kr

〈필자〉 가천대 AI·빅데이터정책연구센터장이다. 데이터·정보통신기술(ICT)·개인정보보호 법 연구자로 관련 법·정책 전문가다. 현재 한국정보법학회장, 한국AI법학회장, UN 국제상거래법위원회 정부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개인정보보호법학회장도 역임했다. 데이터와 ICT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법·제도 개선과 정책 추진에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