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내찬교수의 광고로 보는 통신역사] 〈56〉SK텔레콤 CDMA 30주년, ICT 산업 '마중물'

1995년 7월 CDMA 코엑스 시연 성공 자축 홍보(왼쪽)와  SK텔레콤 본사에 있는 IEEE 마일스톤 현판
1995년 7월 CDMA 코엑스 시연 성공 자축 홍보(왼쪽)와 SK텔레콤 본사에 있는 IEEE 마일스톤 현판
이내찬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
이내찬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

'일반 유선전화와 별 차이가 없을 만큼 감도가 깨끗하네요.' 1996년 1월 3일, SK텔레콤 첫 가입자가 남긴 말이다. 통화품질에 관한 단순 멘트를 넘어서 우리 기술로 구현한 이동통신이 아날로그 시대에 종언을 고하고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는 상징적 선언이었다. 세계 최초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기술의 상용화는 이동통신 산업의 성장과 경쟁, 기술진화와 세계화를 결정한 전환점이었다.

국내 이동통신은 1980년대 초반 집 전화 보급이 통신정책의 핵심이던 시절 한국전기통신공사에서 분리된 한국이동통신(KMT)이 차량 전화·무선호출을 전담하는 형태로 시작됐다. 서비스 지역을 남산 일대에 설치한 기지국 10여 개로 커버하던 당시만 해도 '선 없이 통신이 제대로 될까'라는 회의론이 팽배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되자 가입자는 폭증했고 오히려 네트워크 혼잡이 심각한 문제로 부상했다. 한정된 주파수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기술이 필요했다. 셀룰러 방식은 기지국 단위의 육각형 셀을 벌집처럼 빼곡히 배열해 주파수를 반복 사용할 수 있게 해줬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하면서는 다중화 기술로 셀 내에서 여러 사람이 동시에 주파수 대역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당시 정부의 정보기술(IT) 산업진흥정책은 기술 개발로 핵심 부품의 국산화를 실현한 후 국내 수요 시장으로 상용화를 유도하고 이를 테스트베드 삼아 수출로 연결한다는 구상으로 추진됐다. 이동통신 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럽 표준인 GSM(TDMA) 관련 기술을 이전받을 수 없었던 대신 군사용으로 개발된 CDMA 원천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 퀄컴을 파트너로 선택했다. 1992년 CDMA를 단일 표준으로 선택했고 공동개발 체제(정부-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퀄컴-기업(SK텔레콤·삼성·LG))를 구축한 후 1000억여원을 투입했다. 제조업체 간 경쟁 체제가 도입되면서 개발 속도는 가속화됐고 이 같은 추세는 SK텔레콤이 KMT의 지분을 인수한 후에도 이어졌다.

무모하게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이 형성되는 마중물이 되었다. 5년(1996~2001년)간 부가가치는 65조원으로 연간 GDP(2001)의 약 2%를 공헌했고 IMF 외환위기 시 경제 엔진으로 기능했다. 이동통신시장은 700만명(1997년 기준) 가입자에서 출발한 후 폭풍 성장했고 2년 뒤에는 유선전화를 앞질렀다. 단말기 출하 수는 2560만대(1999년)에서 10배로, 외수 비중은 40%에서 95%로 비약하며 글로벌 입지를 견고히 했다.

1996년 CDMA 상용화는 대한민국 ICT 산업이 민영화, 시장 경쟁, 그리고 글로벌 진출로 이어지는 '퀀텀 점프'를 이룬 전환점이었다. 전화·인터넷과 나란히 문명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공헌을 인정받아 2024년 'IEEE 마일스톤(Milestone)'에 등재됐다.

이내찬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 nclee@hansu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