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년 전, 필자가 스위스 제네바 대한민국 대표부에서 주재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머리를 식힐 겸 사무실 근처 호수인 레만호 주변을 산책하곤 했다. 호숫가를 따라 늘어선 명품 매장에서 유달리 눈길을 끈 것은 고가의 시계 그 자체보다는 시계마다 예외 없이 새겨진 'Swiss Made'라는 짧은 문구였다.
이 문구가 주는 신뢰가 남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는 단순한 정보전달을 넘어 오랜 기간 엄격한 품질관리로 축적해온 신용(Good Will)이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스위스는 이를 마케팅은 물론 법으로 생산 공정과 사용기준을 관리하고, 위조상품 유통 시 'Swiss Made' 국가브랜드의 신용 훼손으로 간주해 정부 차원에서 강력한 대응을 하고 있었다. 브랜드의 가치와 신뢰는 기업뿐 아니라 국가도 함께 힘을 보탤 때 온전히 지켜낼 수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오늘날 K팝, 푸드, 뷰티 등으로 대표되는 K브랜드는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으며 명품 반열에 올라섰다. 수출 또한 역대 최대 수준을 기록하며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다. 제조 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정품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정교한 위조상품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2024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발표에 따르면, 전 세계 K브랜드 위조상품 유통규모는 약 11조원에 달한다. 위조상품 이슈가 개별기업 피해를 넘어 국가 경제 전반을 위협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로 부상했음을 방증한다.
“명품이 아니면 짝퉁도 없다”며 K브랜드의 위조상품 문제에 대해 의연한 대처를 강조해 왔다. 하지만 외국 기업과의 경쟁에 전사적 역량을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위조상품과의 전쟁'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우리 기업들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제아무리 큰 기업이라 하여도 해외 각지에서 독버섯처럼 기승을 부리는 위조상품에 일일이 대응하기란 지난한 일이다. 점조직 형태로 제작·유통되는 실태를 파악하기 어렵고, 침해증거를 입수해 현지 당국에 고발해도 외국기업의 호소에 신속한 집행으로 화답하는 외국의 수사·단속기관을 찾아보긴 쉽지 않다.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해 설령 이겨도 지식재산권 보호가 약한 국가에서는 변호사 비용에도 못 미치는 배상액 판결로 당혹스럽게 한다. 한마디로 위조상품과 전쟁을 치르는 기업에는 '산 넘어 산'이다. 비단 피해는 개별 기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품질기준에 못 미치는 위조 차량부품, 식품, 화장품 등은 구매자의 건강과 안전을 직접 위협함은 물론 K브랜드 전체에 대한 해외 소비자들의 신뢰도 실추와도 직결된다. 이처럼 위조상품 문제는 마치 고차방정식을 푸는 것처럼 정부의 복합적인 정책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작년 11월 초대 지식재산처장으로 부임하면서 우리 기업들이 해외에서 위조상품과 외로운 분투를 이어가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굳어갔다. 해결 방법을 모색하던 중 제네바 시절의 'Swiss Made'를 떠올리며 지식재산처만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기업에 실제 도움이 되는 정책설계를 위해 실무자들과 머리를 맞댔다. 또한, 외부 관계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외국사례를 연구해 지난 3월 말 'K브랜드 정부인증제도' 도입방안을 내놓게 됐다.
![[ET시론] 국가인증 상표로 'K브랜드 보호' 끝까지 책임진다!](https://img.etnews.com/news/article/2026/05/05/news-p.v1.20260505.b743f79de5f54b1fa397f277d9e18aa7_P1.jpg)
K브랜드 정부인증제도 개념설계는 다음과 같다. ①대한민국 정부가 권리자인 국가인증상표를 해외 주요국에 상표권으로 등록한다. ②K브랜드 수출기업이 국가인증상표 사용을 원하면 제품에 부착할 수 있도록 한다. ③국가인증상표에 최신 정품인증기술을 적용하고 해외에서 국가인증상표가 위조되면 기업과 더불어 정부도 권리를 침해당한 당사자로서 적극적인 권리행사에 나선다. 즉 정부, 기업, 소비자가 함께 참여해 K브랜드 위조상품 근절이라는 한 목표를 위해 뛰는 신뢰 기반 시스템인 것이다.
이 시스템은 해외 소비자가 진짜 K브랜드를 체험하고자 하는 정품인증 욕구가 높을 것이라는 합리적 기대에서 출발한다. 즉 가품 구매를 원치 않는 해외 소비자는 인증상표가 부착된 K브랜드 제품 구매 시 스마트폰 카메라로 정품인증 절차를 거쳐 진품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가품으로 판명돼 소비자가 신고하면 우리 정부는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위조상품 유통 실태를 즉각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기술적 지원을 하는 한국조폐공사가 수십 년간 축적한 최신 위조방지기술과 민간 중소기업의 보안 기술을 융합한 첨단 정품인증기술 플랫폼이 진가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정부는 온라인으로 수집된 데이터를 분석하고, 해외 8개국 10개소에 설치된 해외 지식재산센터를 통해 위조상품 유통 증거를 추가 확보할 계획이다. 이처럼 온·오프라인 수집 증거를 종합해 상표권자로서 대한민국 정부의 권리가 침해당했음을 주장하며, 외국 정부에 직접 수사와 단속, 해외세관 통관 차단 등 실질적인 조치를 요구할 것이다. 수집한 증거들은 관련 기업에 제공해 손해배상소송 증거로 활용토록 할 방침이다.
이는 그간 개별 기업에만 맡겨온 위조상품 대응 문제에 국가가 당사자로서 직접 나선다는 K브랜드 보호정책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 정책이 제대로 추진되면 기업은 위조상품 대응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줄여 수출경쟁력을 높일 수 있고, 해외 소비자는 안심하고 K브랜드 정품을 구매할 수 있게 된다. 국가적으로는 K브랜드 전체의 신뢰도와 국가의 호감도가 한층 더 올라가는 효과도 기대된다.
브랜드 신뢰를 쌓기에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지만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다. 지금은 그 신뢰의 기반이 흔들리기 전에 선제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부는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인증상표 개발과 국내 등록을 상반기 중 끝내고 정품인증기술 시스템까지 구축해 8월경 본격 시행하는데 차질 없도록 더욱 속도를 낼 계획이다. 또 해외 소비자들의 인지도 향상을 위해 K팝·드라마 등 한류 콘텐츠를 활용한 해외 홍보에도 만전을 기하려 한다.
K브랜드 위조상품을 만들면 지구 끝까지 추적해서라도 반드시 근절하겠다는 각오로 대책을 만들었다. 최신 정보기술(IT) 경쟁력을 정부 정책에 접목해 명품 브랜드를 많이 보유한 서구 선진국 어디에서도 시도하지 못한 새롭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위조상품 문제를 풀어보고자 한다. K브랜드의 신뢰와 미래 가치를 지키는 일, 이제 대한민국 정부가 그 여정에 앞장설 것이다.
김용선 지식재산처장 iprkhan@korea.kr
〈필자〉1967년생이다. 전주 전라고등학교와 서울시립대 졸업 후, 워싱턴대 법학 석·박사(지식재산 전공) 학위를 취득했다. 1994년 제37회 행정고시로 공직에 입문한 뒤 약 30년간 특허청(現 지식재산처)에서 국제협력과장, 대변인, 산업재산정책국장, 차장 등 주요 직위를 두루 거친 지식재산분야 전문가로 손꼽힌다. 초대 지식재산처장으로 임명(2025.11)돼 정부의 '최고 지식재산 책임자(CIPO)'로서 기술혁신이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이끄는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 지식재산 기반 연구개발(R&D) 혁신, 지식재산 거래 활성화, 기술탈취 방지, K브랜드 보호 등 정책을 추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