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 후반, 미소 냉전 종식과 미국 중심의 세계화는 자유무역의 기치 아래 지구촌의 동반성장을 이끌었다. 인터넷 통신과 첨단기술은 세계를 하나의 생태계로 더욱 단단하게 묶었다. 이젠 인공지능(AI)시대다. 구글 제미나이 등 AI 통번역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며 남아있던 언어 장벽마저 해체되고 있다. 국제 학술대회 현장에선 실시간 AI 통번역이 일상이 되고, 여행객은 낯선 땅에서 각자의 모국어로 거침없이 대화한다. 표준화된 언어체계, 반복적 문장구조와 방대한 데이터가 AI에 학습된 결과다. 향후 AI 에이전트와 피지컬 AI가 보편화되면, 사람보다 AI를 통한 대화가 많아질 것이다. 그 결과 사람 사이에 언어를 통한 직접 소통기회가 줄어드는 역설적인 현상이 일어난다.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사람의 언어는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AI를 다루는 언어역량이 업무성과와 직결되면서, 개인의 처우와 격차로 이어진다. AI는 독창적인 개성과 감성이 깃든 언어보다 명확하고 논리적인 질문과 지시 중심의 언어를 선호한다. AI 최적화에만 매몰될 경우, 인간 고유의 감정이나 공감, 배려가 담긴 진정성 있는 생각과 창의적 아이디어를 언어로 표현하긴 어려워진다. 온라인에 범람하는 은어와 비속어는 일시적 인기를 끌 순 있어도, 품격을 갖추지 못하면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한다. 기존 데이터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AI의 특성상, 지적 탐구를 이끄는 아름다운 단어와 수려한 문장을 창조하는 데 한계가 있다. AI시대일수록 단순한 정보전달을 넘어 인간의 깊은 사유, 감성 및 윤리적 성찰을 담아내는 '고품격 언어'의 창출이 중요하다. 그런 언어가 풍요롭게 등장하는 사회일수록 그 공동체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과거에는 영어 등 패권 언어를 모르면 핵심정보 취득이나 해외진출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언어장벽이 글로벌 교류의 거대한 걸림돌이던 시절이다. 이제 AI를 통해 실시간 정보를 얻고 통번역이 완벽에 가까워진다면, 외국어 실력보다 '아이디어' 자체가 기회가 되는 시대가 열린다. 그렇다면 AI시대에 영어의 위상은 어떻게 될까. AI시대에 영어 없는 소통이 가능할지라도, 인터넷콘텐츠, 논문 등 학습데이터의 영어 비중이 압도적인 점에 주목해야 한다. AI는 영어 기반일 때 최고 성능을 발휘하며, 정보 출처 또한 영어권에 편중되게 만든다. 법적 책임이 수반되는 법률관계에서도 영어가 최종적인 판단기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공감과 협상, 임기응변이 요구되는 고도의 소통 영역에서는 AI를 통하기보다 영어를 직접 구사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AI 시대에 영어의 가치는 오히려 공고해질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어떤가. 온라인에서 별의별 속어와 신조어가 난무한다. 한국어는 새로운 기로에 서 있다. 다행인 것은 AI 실시간 통번역으로 한류 콘텐츠 확산을 가속화하고, 한국문화 체험과 한국어 학습 열풍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어가 외국인에게 매력적인 '취향 언어'이자 '문화·사교 언어'로 자리매김할 기회다. 이 흐름을 잘 탄다면 정치, 외교와 경제 분야 소통에서도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다만 우리 언어가 저급한 속어에 그치거나 혐오를 생산하는 도구로 전락한다면 언어 시장에서 반드시 도태된다. 언어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고 경쟁력이다. 품격을 갖춘 아름다운 표현을 적극 생성해야 하는 숙제가 우리 앞에 있다.
AI는 통계적 확률에 기대어 기존 언어를 복제할 뿐, 수준 높은 창조적 표현에는 미흡하다. AI가 쏟아내는 언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수려한 우리 언어로 승화시킬 역량을 갖춰야 한다. 교육과 기업현장은 글쓰기, 토론문화를 권장하고, 미디어는 '고품격 한국어'를 발굴·확산해야 한다. 언어가 공감, 배려를 잃고 AI효율성에만 침잠하면 소통도구가 아니라 명령어집합에 그친다. 한국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발전시킬지 AI시대 언어주권의 본질을 고민할 때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창의는 어떻게 혁신이 되는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