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유통액)이 사상 최대 수준을 기록했다. 가상자산 거래소 안에서 코인 매매에 쓰이던 대기자금이 국경 간 송금, 결제, 토큰화 금융으로 확산하면서 은행권과 중앙은행의 새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27일 디파이 통계 플랫폼 디파이라마에 따르면 전체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은 3220억달러(한화 약 482조원)를 돌파했다. 이 중 테더의 USDT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영국, 캐나다, 아랍에미리트, 폴란드, 태국, 멕시코 등 95개국의 외환보유액보다 큰 규모다. 현재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보다 더 많은 외환보유액을 보유한 국가는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인도, 대만, 독일 등 14개국에 그친다.
외환보유액은 중앙은행이 환율 방어와 대외 지급 안정을 위해 보유하는 공식 준비자산이다.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이 커졌다는 것은 달러 연동 코인이 그만큼 더 많이 발행돼 시장에서 쓰이고 있다는 뜻이다. 민간이 발행한 달러성 디지털 자산이 국가 중앙은행의 공식 외환자산과 비교될 만큼 커진 셈이다.

과거 스테이블코인은 투자자가 코인을 팔고 현금화하기 전 잠시 머무는 대기자금 성격이 강했다. 지금은 해외 송금, 온체인 결제, 디파이, 토큰화 자산 거래에서 달러를 대신하는 결제 단위로 쓰인다. USDT나 USDC는 은행 송금망을 거치지 않고도 24시간 국경을 넘어 이동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시장 대부분이 달러 기반이라는 점이다. 통화가 불안정하거나 달러 접근성이 낮은 국가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이 사실상 '디지털 달러 계좌'처럼 쓰일 수 있다. 이 자금은 은행 예금이 아니라 블록체인 지갑에 머문다. 이용자가 결제와 보유 목적으로 은행 예금 대신 스테이블코인을 선택하면 은행의 수신 기반이 약해질 수 있다. 중앙은행 입장에서도 자국 통화 수요가 줄고 달러 스테이블코인 보유가 늘어나면 통화정책과 외환관리 부담이 커진다.
국제결제은행(BIS)도 이달 발표한 보고서에서 스테이블코인의 국경 간 이동이 2022년 이후 크게 늘었고, 특히 고물가와 환율 변동성이 큰 지역에서 활동이 두드러졌다고 분석했다. 금융안정위원회(FSB)도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확산이 대규모 환매, 준비자산 부실, 국가 간 감독 공백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각국에 준비자산, 환매 가능성, 감독 체계 정비를 권고해왔다.
유럽에서도 대응이 엇갈린다. 달러 스테이블코인 확산에 맞서 유로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키워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는 반면, 유럽중앙은행(ECB)은 스테이블코인 확대가 은행 예금 변동성과 통화정책 운용 부담을 키울 수 있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국내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논의되고 있지만 실제 결제·송금·토큰증권·실물연계자산 거래 등 사용처를 확보하지 못하면 국내용 결제수단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국내 투자자와 기업의 온체인 거래에서 먼저 확산되면 국내 디지털 금융시장의 달러 스테이블코인 의존도가 커질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스테이블코인은 결제 효율성을 높일 수 있지만, 국경 간 자금 이동이 쉬운 만큼 불법 자금 이동과 자금세탁에 악용될 가능성도 있다”며 “발행·유통·환전 단계별 자금세탁방지 장치가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송혜영 기자 hybrid@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