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밑빠진 독에 물붓기로 비견되는 우리나라 '연구개발(R&D) 패러독스'를 극복하기 위해 민간 기술거래·사업화 전문기관들이 힘을 모아 대형 특수목적법인(SPC)을 만들어야 한다는 대안이 제시됐다. 영세한 규모와 파편화된 공급 체계에서 벗어나, 민간이 주도하는 '원스톱 종합 기술사업화 전문회사'를 출범시켜 글로벌 시장과 대형 국책 과제에 도전해야한다는 전략이다.
28일 한국기술사업화협회(회장 김호원)가 서울 중구 비즈허브서울센터에서 연 '제1차 기술사업화 혁신포럼'에선 이 같은 방향의 우리나라 기술사업화 시장 혁신 방안이 나왔다. 참석한 정부·산업계·학계 전문가들은 어느 일방의 노력보다는 관련 분야 주체들의 공동 노력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김길해 테크비아이 대표(협회 수석부회장)는 국내 R&D 투입 대비 성과 효율성이 떨어지는 구조적 한계를 지적했다. 김 대표는 “지난 25년간 공공 원천기술 누적 건수는 2015년 29만3000건에서 2023년 40만3000건으로 증가했으나, 정작 기술료 수입은 2020년 2790억원에서 2023년 2367억 원으로 줄었다”며 “공공 기술이전율 역시 30% 선이 무너지며 2024년 28.9%까지 급감했다”고 밝혔다.
이어 김 대표는 “기존 정부 및 공급자 중심 정책은 한계에 봉착했다”며 “이제는 민간과 수요자 중심의 건전한 생태계 조성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하며, 공공과 민간 기술이전전문기관(TLO) 간 유기적 협업 구조를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 발제인 '민간주도 SPC 설립을 위한 모델 제안'을 내놓은 김순웅 특허법인 정진 대표는 민간 시장 영세성을 구체적인 수치로 짚었다. 국내 민간 기술거래기관의 80% 이상이 10인 미만의 영세 법인으로 구성되어 있어, 기술 발굴부터 계약, 사후 관리에 이르는 전주기 대응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이로 인해 전문 인력이 이탈하고 수익 구조가 악화되는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이에 대한 해법으로 각 분야 전문성을 가진 부티크 전문기업들이 결집하는 '3단계 점진적 통합 모델'을 제안했다. 초기 자산 통합의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공동 수주용 SPC를 먼저 설립한 뒤(1단계) , 프로젝트별 협력을 통해 신뢰를 쌓고(2단계) , 최종적으로 완전한 흡수합병(M&A)을 이루는 방식이다(3단계).
이 모델은 개별 기업의 강점을 살린 매트릭스 조직으로 운영되며, 인사·노무·회계 등을 단일화한 '공유 서비스 센터(SSC)'를 통해 고정비를 30% 이상 절감하게 된다. 또 영업과 수행 기여도를 정교하게 반영한 '3단계 정산 모델'을 도입해 민간 연합체의 고질적인 갈등 요소까지 차단하도록 구상됐다.
이어진 패널토론은 김경환 성균관대 글로벌창업대학원장이 좌장을 맡아 국내 기술사업화 생태계의 현실적 문제를 진단하고, 이를 타개할 대안으로써 민간 주도 SPC 설립 모델에 초점이 맞춰졌다.
정부 정책 기조 역시 민간의 대형화를 독려하고 있다. 정부는 최근 기술사업화 촉진법 개정을 통해 민간 기술거래기관의 대형화·전문화를 유도하고 있으며, 연 10억원 규모 대형 국책 과제에 컨소시엄 가점을 부여하는 등 힘을 싣고 있다.
통합 SPC는 다음달 핵심 발기인 협약 체결과 설립 추진위원회 구성을 마치고, 이르면 7월 법인 등록을 한뒤 정식 출범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이어 하반기부터 대형 과제 공동 입찰과 통합 브랜드 론칭에 나서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김호원 기술사업화협회 회장은 “이번 포럼은 영세한 민간 중개기관들이 덩치 키우기를 넘어 서비스 품질을 표준화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며 “민간 주도 기술사업화의 성공적인 선도 모델을 만들어가는 단초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이경민 기자 km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