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앨범 '미드나잇 모놀로그' 표지 사진[제공=스타인웨이]](https://img.etnews.com/news/article/2026/06/08/news-p.v1.20260608.aef0ab5bb1bf49a597c48a39b42331f7_P1.png)
“Love. 사랑입니다.”
20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짧았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음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유정 뉴욕대학교(NYU) 피아노과 교수는 잠시 미소를 짓더니 한 단어를 꺼냈다. 설명도 수식어도 없었다. 그러나 2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그 한마디 안에 그의 삶 전체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NYU 최초의 한인 피아노 교수, 작곡가, 예술감독, 그리고 'Steinway & Sons' 아티스트.
화려한 타이틀을 나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정작 김유정은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지 않았다.
“저는 예술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음악을 통해 사람들에게 사랑의 소중함과 공감, 위로와 감동을 전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인터뷰 내내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성공도, 명예도, 경쟁도 아니었다. 사랑, 공감, 연결, 그리고 사람. 어쩌면 그것이 지금의 김유정 피아니스틀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언어인지도 모른다.
피아노는 악기가 아니라 친구였다
김유정에게 음악은 선택의 결과가 아니었다.
많은 음악가들이 “음악을 선택했다”고 말하지만, 그는 오히려 음악이 자신의 삶 속에 너무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었다고 말한다.
“피아노가 삶의 일부가 된 시점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피아노가 없던 시절을 기억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그의 어린 시절 기억에는 언제나 피아노가 있다. 연습해야 하는 악기가 아니라 장난감처럼, 친구처럼 곁에 있었다.
“혼자 피아노를 치면서 상상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피아노는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음악은 제가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언어가 됐습니다.”
그래서일까.
음악을 하지 않는 삶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 웃었다.
“솔직히 잘 상상이 안 됩니다. 음악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제 삶 자체였으니까요.”

런던에서 만난 또 하나의 고향
김유정이 처음 홀로 영국 유학길에 오른 것은 어린 나이였다.
지금처럼 인터넷과 SNS로 전 세계가 연결된 시대가 아니었다. 해외 유학 자체가 모험이었고, 낯선 세상으로의 도전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두려움'보다 '설렘'을 먼저 이야기했다.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고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가까이에서 만난다는 것이 너무 설렜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완전히 달라졌던 시기였죠.”
그에게 런던은 단순한 유학지가 아니다.
“런던은 제가 처음으로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을 발견한 곳입니다. 지금도 특별한 향수를 느끼는 도시예요. 어쩌면 또 하나의 고향 같은 곳입니다.”
그곳에서 그는 음악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문화와 역사, 그리고 삶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외로움보다 호기심이 컸습니다”
세계적인 무대 뒤에는 늘 외로움이 따른다. 하지만 김유정은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저는 외로움을 크게 느끼며 살아온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는 늘 다음을 바라봤다. 더 배우고 싶었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었다.
목표를 이루면 곧바로 다음 질문을 던졌다.
'What's next?'
“돌이켜보면 늘 좋은 동료들과 스승,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외로움보다 앞으로 무엇을 배우고 어떤 사람을 만날지에 대한 기대가 더 컸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을 “외로움보다 호기심이 큰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실패를 대하는 법
화려한 경력 뒤에도 실패와 좌절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실패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분석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무엇을 다르게 할 수 있었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질문도 바뀐다.
“왜 그랬을까?”에서 “그렇다면 다음에는 어떻게 할까?”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 역시 음악이다.
“저는 음악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믿듯이 음악을 믿습니다. 음악은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줍니다.”

“위로보다 영감을 받습니다”
김유정은 음악을 통해 치유와 위로를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정작 그는 무엇으로 위로받을까. 질문을 들은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동안 누군가를 위로하는 일에 더 집중하며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니 답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었다.
“제 음악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학생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 좋은 사람들과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눌 때 저 역시 위로를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단순한 위로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감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영감은 다시 음악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질문이 되고, 새로운 작품이 되고, 또 다른 무대로 이어진다.
“Midnight Monologues는 저의 독백이자 우리 모두의 독백입니다”
최근 발표한 앨범 'Midnight Monologues'는 김유정 음악 세계를 가장 솔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이다.
앨범 제목 그대로 '한밤의 독백'을 담은 이 작품은 화려한 기교나 거대한 서사보다 인간의 내면에 집중한다. 기억과 그리움, 사랑과 희망, 상실과 치유 같은 감정들이 조용히 스며든다.
그는 이 작품을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음반이라기보다 “아주 조용하고 솔직한 내면의 대화”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생각과 감정을 경험하지만 정작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시간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특히 밤은 낮 동안 미뤄 두었던 감정과 생각들이 조용히 찾아오는 시간이기도 하고요.”
그는 이번 앨범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 오히려 듣는 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가장 솔직하게 전하고 싶었던 감정은 공감이었습니다.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듣기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실제로 공연과 음반을 접한 청중들은 오래전 추억이 떠올랐다거나 잊고 있던 기억의 한 장면을 다시 만난 것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려준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이 음악이 제 개인적인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누군가의 삶과 기억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는 'Midnight Monologues'를 자신의 독백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독백이라고 표현했다.
“10년 전 음악은 오래된 일기장을 다시 펼쳐보는 일”
이번 앨범에는 또 다른 의미도 담겨 있다. 과거의 자신과 다시 만나는 작업이었다는 점이다. 김유정은 오래전 자신이 만든 음악을 다시 들을 때면 마치 10년 전의 일기장을 펼쳐보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어떤 부분은 지금의 저라면 다르게 썼을 것 같고, 기술적으로 더 발전시킬 수 있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음악 안에는 그 시절의 제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때의 고민과 시선,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던 방식이 음악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저는 오래전의 저를 다시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그 시절의 나와 마주하는 것처럼요.”
그는 과거의 작품을 평가하기보다 대화를 나누는 기분으로 마주한다고 했다.
“때로는 미숙하고 때로는 순수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지금의 제가 과거의 저에게 위로를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Steinway Artist, 또 하나의 시작
김유정은 현재 세계적인 피아노 브랜드 '스타인웨이 앤 선즈(Steinway & Sons)'가 선정한 Steinway Artist로 활동하고 있다.
수많은 전설적인 피아니스트들이 이름을 올린 상징적인 명단이다. 하지만 그는 이를 도착점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Steinway Artist로 활동하게 된 것은 제게 큰 영광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존경해 온 수많은 연주자들이 만들어 온 유산을 이제는 저 또한 함께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감사와 책임감을 느낍니다.”
특히 Steinway & Sons 레코딩 레이블을 통해 자신의 음악을 세상과 나눌 수 있다는 점도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고 했다. 그는 이제 과거 자신이 동경하던 이름들과 같은 위치에 서 있지만, 시선은 오히려 미래를 향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 이름들을 바라보며 꿈을 꾸었다면 지금은 그 전통과 가치를 어떻게 이어가고 저만의 목소리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지를 더 많이 생각합니다.”
Steinway & Sons를 단순한 브랜드가 아니라 오랜 시간 음악가들과 함께 성장해 온 하나의 역사이자 문화라고 말한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전통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은 제게 큰 영광인 동시에 책임입니다.”
AI 시대, 인간 예술의 가치는 무엇인가
AI가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는 시대.
많은 예술가들이 위기감을 느끼지만 김유정은 비교적 담담하다.
“기술의 발전은 흥미롭고 앞으로 예술을 크게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예술의 본질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예술은 한 인간이 살아오며 경험한 시간과 기억, 사랑과 상실을 담아내는 행위입니다.”
AI는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사랑하고 기다리고 상처받고 용서하며 살아온 경험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고 그는 말한다.
“저는 예술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공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닿고, 그 안에서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말입니다.”
그래서 AI 시대가 될수록 오히려 인간의 경험과 감정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인터뷰 말미.
화려한 경력과 수많은 타이틀을 모두 내려놓는다면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냐고 묻자 그는 미소를 지었다.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MusicY Creative의 로고 이야기를 꺼냈다. 하트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직접 그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제가 믿어 온 사랑의 힘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피아니스트 이전에, 교수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역시 사랑이라고 했다.
“사람에 대한 사랑, 삶에 대한 사랑, 음악에 대한 사랑. 결국 제 삶의 중심에는 늘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
인생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음악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Love. 사랑입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어쩌면 김유정이라는 음악가의 인생 전체를 설명하는 가장 긴 문장이었다.
소성렬 기자 hisabisa@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