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간 폐기율도 80% 넘어
무더기로 법안 발의만 쏟아내고 품질은 떨어져
법안 발의시 실태조사와 실증분석 병행되어야

제22대 국회의 디지털 산업 입법을 법률 적정성과 산업·기술 환경 정합성, 집행 메커니즘 등을 기준으로 평가한 결과 100점 만점에 26.1점에 그쳤다. 최근 5년간 관련 법안의 임기 만료 폐기율도 80%를 넘었다. 법안은 무더기로 발의되지만 입법 품질과 실제 법률 반영률은 낮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산업 입법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실태조사와 실증분석을 바탕으로 규제를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민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국인터넷기업협회가 30일 국회입법조사처에서 연 '디지털 산업을 위한 입법 품질 혁신' 세미나에서 국회의 디지털 산업 입법이 낙제점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 디지털산업입법평가위원장을 맡은 김 교수는 2024년 5월부터 2025년 5월까지 발의된 제22대 국회의 디지털 산업 관련 법안을 분석한 결과 평균 점수가 100점 만점에 26.1점이었다고 밝혔다.
평가는 △법적 차원인 법률용어 적정성과 헌법원칙 준수성 △산업 차원인 산업·기술 환경 정합성과 국내외 규제 정합성 △집행 차원인 규제 집행 메커니즘과 규제 거버넌스를 기준으로 이뤄졌다. 각 항목은 각각 27.7점과 24.4점, 26.0점이었다. 법적 체계와 산업 생태계 정합성, 규제 실효성 모두 낮은 평가를 받은 셈이다.
낮은 평가는 제22대 국회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김 교수는 2021년부터 2025년까지 발의된 디지털 산업 관련 법안 865건을 분석한 결과 평균 점수는 25.3점, 법률 반영률은 19.3%, 임기 만료 폐기율은 80% 이상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산업 측면”이라면서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법안을 만들어버리면 수범자 입장에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사전적이고 일방적인 규제 설계가 반복되면서 산업 현실과의 괴리가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품질이 낮은 법안은 폐기되더라도 반복적인 입법 추진 자체가 기업의 투자 결정을 위축시키고 규제 대응 비용을 높인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80% 정도 폐기되는 법안을 자꾸 만들면 수범자 입장에서는 겁박같이 느껴진다”면서 “(산업 내) 문제를 자생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 먼저 지켜봐야 한다”고 밝혔다.
디지털 산업뿐 아니라 국회 전체에서 법안 발의가 급증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승민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제21대 국회에서 총 2만5858건의 법안이 제안됐다고 설명했다. 이는 제13대 국회의 938건보다 27.5배 늘어난 수치다. 이 가운데 의원 발의안이 91.5%를 차지했다.
이 교수는 디지털 경제가 플랫폼 생태계와 인공지능(AI) 중심으로 전환하는 상황에서 '규제 실증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규모 시장 조사를 바탕으로 한 실증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규제의 필요성과 효과를 평가할 수 있는 체계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미다.
대응책으로는 실증분석을 바탕으로 한 규제 설계가 제시됐다. 시장 구조와 사업 모델을 파악하기 위한 실태조사와 실증분석을 선행하고 규제 필요성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규제 목적과 대상, 우선순위를 고려해 규제 방식과 강도를 정해야 한다.
이 교수는 배달 애플리케이션(앱) 조사 사례를 예로 들면서 “조사 내용을 보면 표본이 보통 1000개가 잘 안 넘고, 표본 500개일때도 많다”면서 국회 차원에서 대규모 시장 조사를 바탕으로 한 신뢰성있는 입법 평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진 토론에서는 새로운 기술이나 산업에 대한 의회의 규제 성향이 강한 만큼 규제를 도입하기 전에 충분히 숙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황성기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새로운 기술이나 산업이 등장할 때마다 기존 규제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하는 규제의 상향 평준화를 시도하려 하지, 새로운 기술이나 산업이 성장하도록 기존 규제를 완화하는 규제의 하향 평준화는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황창근 홍익대 법과대학 교수는 “입법 과정에서 숙의성 보장 장치를 통해 법안의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면서 “디지털 산업의 입법 과정에서 다양한 토론을 하면 태생적인 문제점을 탈피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정부가 법률안을 마련하고 국회의원을 통해 의원 명의로 발의하는 '청부 입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도 제시됐다.
김도승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부가 청부한 입법을 국회의원이 논의할 때 비판적 관점에서 논의가 될 수 있나”면서 “청부 입법에 관한 부분은 정부가 좀 더 의지를 가지고 (제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디지털 산업 규제 입법은 스타트업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사전에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공동대표는 “일단 스타트업에게 규제는 단순한 행정 부담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창업할 것인지 해외에서 창업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면서 “디지털 산업 입법을 준비할 때 기존 법으로도 해결 가능한 문제인지, 스타트업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지는 않는지, 국내 기업과 해외 기업 간 형평성은 맞는지, AI와 데이터 활용 실증 환경을 위축시키지는 않는지, 앞으로 창업하려는 사람에게 한국을 선택하게 만들 것인지를 함께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변상근 기자 sgby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