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선]한국형 산업전략의 새출발

김명희 기자
김명희 기자

중국은 더 이상 저가 공세와 속도전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단계에 들어섰다. 최근 다녀온 상하이에서는 전기차와 모바일 결제가 이미 일상이었고, 그 변화는 도시의 생활 방식까지 바꾸고 있었다. 배기가스와 소음이 크게 줄어든 거리, 도로 옆 테라스 식당에서 느낀 쾌적함은 인상적이었다.

미국이 중국산 전기차와 배터리, 첨단 제조업을 강하게 견제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중국의 경쟁력은 기술 개발에 그치지 않는다. 실증과 초기 수요, 산업 생태계를 동기에 키우며 시장을 만들어온 결과다.

이재명 정부가 제시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다시 봐야한다. 단순히 지역별 대형 프로젝트를 나열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한국이 어떤 산업에서 어떤 방식으로 경쟁할 것인지, 기업이 실제로 투자하고 실증하고 수출할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가 핵심이다. 특정 지역의 수혜 여부나 지역 간 이해관계가 산업정책의 본질을 가려서는 안 된다.

메가 프로젝트가 놓쳐서는 안 될 핵심은 '초기 수요 창출'이다. 수요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업이 좋은 기술과 제품을 개발해도 촘촘한 규제에 막히거나, 홍보와 마케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실제 수요처에 닿기 어렵다. 특히 신산업일수록 기존 제도와 충돌하는 경우가 많아 시장 진입 장벽은 더욱 높다.

특히 첨단 산업일수록 비슷한 목소리가 나온다. 기술보다 규제, 수요보다 인증, 제품보다 실증 공간이 더 큰 병목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개발한 제품을 실제 현장에서 시험할 수 없고, 초기 시장이 열리지 않으면 기술은 산업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한국은 배터리, 반도체, 자동차, 전자, 로봇 부품 기업이 연결돼 있고 글로벌 고객사와의 협업 경험도 풍부하다. 최근 중국 기업들이 한국 시장을 해외 시장 확장 전략의 테스트베드로 삼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 시장의 레퍼런스가 매력적이란 의미다.

이제는 기술 개발과 제품 공급만으로 경제 성장을 이끌기 어렵다. 첨단산업일수록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초기 수요가 필요하다. 국내 스타트업 상당수는 창업 초기부터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하지만, 해외 진출을 위해서는 한국 시장에서의 레퍼런스가 필요하다. 메가 프로젝트가 대기업뿐 아니라 중견·중소기업, 스타트업까지 아우르려면 기술 개발 이후 시장으로 이어지는 생태계 징검다리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

지역과 공공 부문은 더 적극적인 역할을 고민해야 한다. 공공이 무조건 기업 제품을 사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실증 공간을 열어주고, 초기 적용 사례를 만들고, 민간 수요로 이어질 수 있는 첫 시장을 만드는 역할은 필요하다. 중국은 이미 공공 부문이 첨단산업의 초기 수요처 역할을 하며 산업 성장의 발판을 만들고 있다.

산업정책은 더 이상 한 나라 안에서만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로봇 등 전략 산업을 둘러싼 경쟁은 세제와 보조금, 통상, 외교, 인재, 규제까지 총동원되는 국가 대항전이 됐다. 개별 기업의 경쟁력만으로 이 흐름을 이겨내기는 쉽지 않다.

메가프로젝트가 성공하려면 당장의 성과보다 긴 호흡으로 미래 산업을 바라봐야 한다. 한국 기업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정책과 투자가 집중되고, 기술 개발을 넘어 실증과 초기 수요, 시장 창출까지 이어지는 산업 생태계를 함께 설계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만'한국형 산업정책'도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김명희 기자 noprint@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