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 10조' ESG 공시 의무화…상장사 부담 커진다

당정, 법정공시 직행 확정
2028년부터 단계적 확대
기업 “CEO 법적 책임 급증”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오른쪽 두 번째)이 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지속가능성 공시 제도화 방안 관련 당정 협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오른쪽 두 번째)이 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지속가능성 공시 제도화 방안 관련 당정 협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정부가 기업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공시를 거래소 의무공시가 아닌 사업보고서 법정공시로 직행시키기로 했다. 글로벌 기준에 맞춘 제도라는 평가도 있지만, 기업은 “최고경영자(CEO) 법적 책임과 공시 부담이 급격히 커질 수 있다”며 반발했다.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8일 당정협의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지속가능성(ESG) 공시 제도화 방안'을 확정했다. 당초 연결자산총액 30조원 이상 상장사부터 적용하려던 계획을 수정해 2028년부터는 10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 2029년에는 5조원 이상으로 의무 대상을 확대하기로 했다. 2028~2029년 운영 결과를 평가해 2030년에는 2조원 이상 상장사까지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한다.

가장 큰 변화는 공시 채널이다. 정부는 거래소 의무공시를 먼저 시행한 뒤 일정 기간 이후 자본시장법상 법정공시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최종안에서는 이를 철회했다. 대신 2028년부터 사업보고서를 통한 법정공시를 곧바로 시행하기로 했다. 재무정보와 지속가능성 정보를 같은 시점에 공시해 투자자 활용도를 높이겠다는 취지다.

경제계는 산업 현장의 준비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제도 도입 속도를 높였다고 우려한다. 경제6단체는 공동성명을 통해 “지속가능성 공시는 공급망 전반의 데이터 수집과 인증, 전문인력 양성 등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수반되는 중장기 과제”라며 “공시 데이터의 상당수가 예측·추정 정보인 만큼 법정공시가 바로 시행될 경우 불확실성에 따른 법적 리스크가 기업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공시 일정 자체도 부담 요인이다. 경제계는 온실가스 배출량 인증과 기후 관련 재무영향 분석이 재무결산 이후 가능한 경우가 많아 외부감사와 정기주주총회, 사업보고서 작성 일정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충분한 검증 없이 공시가 이뤄질 가능성이 있는 만큼 제도 시행 전에 실무 여건부터 갖춰야 한다는 주장이다.

금융권과 기업은 가장 우려하는 대목으로 '법정공시 직행'을 꼽는다. 거래소 공시는 투자자와 시장을 위한 참고 정보 성격이 강하지만 사업보고서는 허위나 누락이 발생하면 민·형사상 책임과 금융당국 제재 대상이 된다. ESG 정보는 재무정보와 달리 미래 예측과 추정, 가정이 상당 부분 포함되는 만큼 경영진의 법적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금융 전문가는 “기업이 거래소 공시를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는 CEO 책임 차이”라며 “스코프3 배출량이나 기후 시나리오, 탄소중립 전환계획처럼 불확실성이 큰 정보가 사업보고서에 들어가면 경영진의 책임 리스크가 급격히 확대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업 부담도 만만치 않다. 법정공시는 재무보고 수준의 내부통제와 검증 체계를 요구하는 만큼 ESG 데이터 관리 시스템 구축과 외부 검증, 전문 인력 확보 등에 상당한 비용이 필요하다. 정부가 초기 3년간 한시적 면책과 이후 세이프하버(Safe Harbor)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지만, 업계에서는 추정정보에 대한 책임 범위가 명확하지 않다는 우려가 여전하다.

가치사슬 전반의 배출량을 의미하는 스코프3(Scope 3) 공시 역시 부담이다. 정부는 공시 시점을 3년 유예하기로 했지만 산업계는 준비 기간이 충분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한 산업계 관계자는 “스코프3는 기업이 직접 통제하기 어려운 공급망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만큼 데이터 수집과 검증 체계 구축 상황을 고려해 시행 시기를 보다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유럽과 비교해도 우리나라의 제도 전환 속도가 빠르다고 평가한다. 유럽은 거래소 중심의 자율공시를 거쳐 2014년 비재무정보공시지침(NFRD)을 시행했고, 이후 공시 기준과 외부검증 체계를 정비한 뒤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을 통해 전면 법정공시 체계를 구축했다. '자율공시-부분 의무화-전면 법정공시'의 단계를 밟았지만 한국은 거래소 공시 단계를 사실상 생략했다는 지적이다.

금융 전문가는 “거래소 공시를 일정 기간 운영하면서 표준 공시 양식과 세이프하버, 그린워싱 판단 기준 등을 충분히 축적한 뒤 법정공시로 전환하는 것이 시장 충격을 줄이는 방식”이라며 “현재처럼 곧바로 법정공시를 적용하면 기업들이 방어적으로 공시하거나 최소한의 정보만 공개하는 부작용도 우려된다”고 말했다.

정부는 글로벌 투자자의 정보 수요와 녹색전환(GX)을 고려하면 공시를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입장이다. 관계부처는 한국형 기후리스크 통합플랫폼 구축, 스코프3 업종별 산정 가이드라인 마련, ESG 컨설팅 확대 등을 통해 기업 부담을 줄이겠다고 밝혔다. 국민연금은 ESG 공시를 책임투자와 기업 대화에 활용하고, 금융권도 총 790조원 규모 기후금융과 전환금융 심사에 공시 정보를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

이번 방안은 ESG 공시 제도를 글로벌 기준에 맞춰 조기에 안착시키겠다는 정부 의지를 담았다. 다만 속도감과 현실성 사이의 균형이 향후 제도 안착의 변수로 떠오를 전망이다.

오지헌 법무법인 원 ESG센터장은 “이번 공시 의무화는 ESG 제도화의 첫걸음인 만큼 의미가 크다. 다만 당사자인 기업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우려되는 부분이 있다”면서 “거래소 공시 단계 없이 곧바로 법정공시로 전환하는 만큼 금융기관의 ESG 투자와 기업의 ESG 경영 내재화, 글로벌 무역규제 대응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신속하고 탄력적인 지원조치가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준희 기자 jhlee@etnews.com, 류근일 기자 ryury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