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전기차 배터리 안전 기준이 한층 강화되면서 업계 전반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 지난 7월 1일부터 중국에서는 전기차 배터리 안전을 규정하는 국가표준인 '전기차용 동력배터리 안전 요구사항(GB 38031-2025)'과 '전기차 안전 요구사항(GB 18384-2025)'이 동시에 시행됐다. 업계에서는 이를 '역대 가장 엄격한 배터리 안전 규정'으로 평가한다. 핵심은 열폭주 안전 기준이다. 기존에는 배터리 이상 발생 시 화재 발생 5분 전까지 경고를 제공하는 수준이었다면, 새 기준은 열폭주가 발생하더라도 최소 2시간 동안 화재나 폭발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여기에 300회 급속충전 이후 하부 충격시험과 다양한 안전성 평가까지 추가되면서 제조사들의 부담도 크게 늘어났다.
새 기준 시행 이후 업계 관심은 안전성 자체보다 이를 충족하기 위한 비용과 시장 영향으로 옮겨가고 있다. 배터리 제조사와 완성차 업체는 늘어난 개발·검증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지, 보급형 전기차 가격은 얼마나 오를 것인지, 소비자는 안전성 향상을 위해 어느 정도의 가격 인상을 받아들일 것인지가 새로운 화두가 됐다.
시장에서는 이미 선두 기업과 후발 기업의 대응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CATL과 BYD는 모든 주요 배터리 제품이 새로운 국가표준을 충족했다고 발표했다. BYD는 블레이드 배터리와 급속 충전용 블레이드 배터리가 올해 5월 모든 인증을 마쳤다고 밝혔으며, 샤오펑(Xpeng), 지커(Zeekr), 지리자동차, 둥펑닛산, GAC토요타, 리프모터 등도 잇달아 기준 충족 사실을 공개했다. 중국중앙방송(CCTV)은 GAC토요타의 bZ3X와 bZ7을 대표 사례로 소개하기도 했다.
반면에 중소 배터리 업체들은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됐다. 업계에서는 새로운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배터리팩 구조를 개선하고 단열재와 배터리관리시스템(BMS), 고전압 릴레이 등을 새롭게 설계할 경우 배터리 원가가 15~20% 상승할 것으로 추산한다. 완성차 기준으로는 차 한 대당 약 4000~6500위안 제조원가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생산라인 개조와 시험설비 구축, 품질 추적 시스템 도입 등 추가 투자까지 감안하면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이번 안전 기준이 구조조정을 가속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일부에서는 중소 배터리 업체 30~40%가 시장에서 도태될 가능성도 제기한다. 실제로 완성차 업체들은 공급망 재편에 속도를 내고 있다. 화웨이의 하모니 인텔리전트 모빌리티, 리오토, 샤오펑 등은 기존 주력 공급업체 외에 CALB, 고션하이테크, 선워다 등 복수의 배터리 공급사를 확보하는 전략을 확대하고 있다. 모든 공급사가 새로운 안전 기준을 충족한다는 전제 아래 공급망을 다변화해 공급 리스크를 줄이고 가격 협상력을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비용 부담을 소비자에게 그대로 전가하기는 쉽지 않다. BYD와 지리자동차는 가격 인상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규모의 경제와 생산 효율 개선으로 추가 비용을 흡수하겠다는 입장이다. 일부 제조사는 구형 기준 차량과 신기준 차량을 일정 기간 함께 판매하며 점진적으로 전환하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다만 중소 업체들이 모두 시장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은 다소 성급하다는 분석도 있다. 승용차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더라도 에너지저장장치(ESS), 이륜차, 산업용 차량 등 다른 시장으로 사업을 전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산업 재편은 단기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년간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기술 측면에서는 리튬인산철(LFP) 배터리가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LFP는 삼원계 배터리보다 열 안정성이 높아 새로운 기준을 충족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BYD의 블레이드 배터리는 이미 못 관통 시험에서 화재나 폭발 없이 안전성을 입증한 바 있으며, 2세대 블레이드 배터리는 열폭주 억제 시간을 24시간 이상으로 늘렸다고 밝혔다. 하부 충격시험에서도 국가 기준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충격을 견뎌냈다는 설명이다.
CATL은 구조 설계를 최적화한 기린(Qilin) 배터리를 앞세우고 있다. 배터리 셀 간 공간 활용도를 높이고 열 확산을 억제하는 기술을 적용해 안전성과 에너지 밀도를 동시에 확보했다. CATL은 새로운 국가표준 시행 이후 전기차 화재 발생률이 내연기관 차량보다 훨씬 낮아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 기준 강화가 연구개발 방향 자체를 바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동안 배터리 산업은 에너지 밀도와 주행거리 확대에 집중했지만 앞으로는 열관리 기술과 안전성이 핵심 경쟁력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라 액체 전해질 배터리의 열 차단 기술은 물론 반고체와 전고체 배터리 개발도 더욱 빨라질 전망이다. 나트륨이온 배터리 역시 안전성을 강점으로 새로운 기회를 맞을 것으로 기대된다.
소비자 입장에서 가장 큰 변화는 전기차에 대한 신뢰도 향상이다. 그동안 전기차 화재는 소비자들이 가장 우려하는 요소였다. 특히 충돌 이후 화재나 장기간 급속충전 후 발생하는 열화 현상은 구매를 망설이게 하는 대표 요인이었다. 새 기준은 셀, 모듈, 차량 시스템 전반에서 다중 안전장치를 요구하고 있어 사고 발생 가능성을 크게 낮출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이번 기준은 신규 출시 차량에만 적용된다. 이미 운행 중인 차량은 소급 적용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기존 전기차 이용자는 추가적인 개조 의무가 없으며, 향후 신차를 구매할 때 새로운 안전 기준을 적용받게 된다.
시장에서는 안전 기준 강화만으로 소비자 불안이 완전히 해소되기는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배터리 품질은 수년간 사용해야 실제 내구성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특히 중소 배터리 업체가 향후 경영난으로 시장에서 퇴출될 경우 사후 서비스와 품질 보증 문제가 새로운 과제로 떠오를 가능성도 있다. 배터리 성능 저하나 충전 속도 감소 등은 아직 명확한 법적 결함으로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럼에도 시장은 당분간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승용차시장정보연석회에 따르면 올해 6월 신에너지 승용차 판매는 약 105만대로 전월 대비 10%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보급률도 60%를 넘어섰다. 새로운 안전 기준이 시행됐지만 소비 위축으로 이어질 조짐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결국 이번 국가표준은 단순한 안전 규정의 개정을 넘어 산업 경쟁 구도를 다시 짜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대형 기업들은 강화된 기준을 기술 경쟁력으로 활용하며 시장 지배력을 확대하고 있고, 중견 기업들은 비용과 투자 사이에서 균형을 모색하고 있다. 후발 업체들은 사업 전환이나 시장 철수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다. 단기적으로는 기업들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지만, 장기적으로는 전기차 산업의 안전성과 신뢰도를 높여 시장 성숙을 앞당기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평가가 우세하다.
※전자신문과 36케이알이 공동 기획한 기사입니다.
김현민 기자 mink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