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데이터센터 시장의 경쟁 구도가 전력 확보를 넘어 설비 경쟁력으로 확장되고 있다. 생성형 AI와 고성능 GPU 연산 수요가 빠르게 늘면서 대용량 전력 확보는 데이터센터 개발의 기본 조건으로 자리 잡았지만, 전력을 확보한 자산이라고 해서 모두 우량 자산으로 평가받기는 어려워지고 있다.
AI 서버의 전력 밀도와 발열이 높아지고 냉각 방식, 랙 하중, 전력 분배 구조에 대한 요구 수준이 빠르게 바뀌면서 자산가치 평가 기준도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 오피스나 물류센터가 입지, 공실률, 임차인, 건물 상태 등을 중심으로 평가된다면, AI 데이터센터는 여기에 더해 랙당 전력 밀도, 냉각 방식, 바닥 하중, 향후 자본적 지출 부담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기존 데이터센터와 최신 AI 서버가 요구하는 설비 수준 사이에는 이미 상당한 격차가 나타나고 있다. CBRE 코리아에 따르면 국내외 기존 데이터센터의 산업 평균 랙당 전력 밀도는 15~25kW 수준인 반면, 블랙웰 세대 AI 서버의 실운영 평균 전력은 40~100kW에 달한다. 전력을 확보했더라도 기존 설비가 최신 GPU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면 임차 경쟁력과 자산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CBRE 코리아는 '한국 데이터센터 투자' 리포트에서 AI 데이터센터의 경쟁력이 단순한 가용 전력 확보 여부를 넘어 고성능 GPU 서버를 안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설비 대응력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랙 전력 밀도는 기존 5kW 수준에서 AI 서버 수요에 따라 40~50kW 수준으로 높아질 수 있으며, 2026~2028년 루빈과 파인만 세대 진입 시 산업 전체 평균 전력 밀도가 50kW 이상으로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데이터센터 투자자와 임차인 모두에게 중요한 변화다. 임차인에게는 고성능 GPU 서버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고, 투자자에게는 해당 자산이 향후 기술 변화에도 임대 경쟁력과 현금흐름을 유지할 수 있는지가 핵심 검토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AI 워크로드가 학습 중심에서 추론 중심으로 이동하는 점도 데이터센터의 입지 기준에 영향을 주고 있다. 학습용 데이터센터는 저렴한 전력과 넓은 부지를 확보할 수 있는 외곽 지역에 입지할 수 있지만, 추론용 데이터센터는 실시간 응답이 중요해 사용자와의 물리적 거리와 지연율, 네트워크 안정성이 핵심이다.
리포트는 2027년 이후 AI 추론 수요가 학습 수요를 상회할 것으로 전망했다. 2025년 전체 AI 수요의 26%였던 추론 비중은 2030년 42%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수도권이나 주요 수요처 인근에서 전력과 통신 인프라를 확보한 데이터센터의 전략적 가치도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수요 주체 역시 다변화되고 있다. 기존 데이터센터 시장은 AWS, Microsoft Azure, Google Cloud 등 글로벌 클라우드 서비스 제공업체(CSP)를 중심으로 성장했지만, 최근에는 고성능 GPU 인프라를 기반으로 컴퓨팅 자원을 임대하는 네오클라우드 사업자가 새로운 수요층으로 부상하고 있다.
엔스케일, 코어위브, 람다, 네비우스 등 글로벌 네오클라우드 사업자들은 한국을 포함한 주요 아시아태평양 시장을 검토하고 있다. 이들이 대용량 전력과 고밀도 랙, 고도화된 냉각 솔루션을 요구하면서 데이터센터의 설계·운영 기준도 높아지고 있다. 결국 같은 규모의 전력을 확보했더라도 최신 GPU 수요를 실제로 수용할 수 있는지가 임차인의 선택과 자산 등급을 가르는 기준이 되고 있다.
데이터센터의 기술 수명도 새로운 자산 평가 기준으로 떠오르고 있다. 일반적인 상업용 부동산의 노후화가 건물 연식과 관리 상태 등으로 설명된다면, 데이터센터의 기술 수명은 IT 인프라 요구 사양의 변화와 더 밀접하게 연결된다. 준공 당시 최신 사양을 갖춘 자산이라도 GPU와 서버 아키텍처가 빠르게 바뀌면 기존 설계가 시장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수 있다.
데이터센터의 기술 대응 기준은 하중, 전력 밀도, 냉각, 완전 설비형 구조 등 네 가지 축으로 나눠진다. AI 서버 수용을 위한 랙당 하중 조건은 기존 1.5톤/㎡에서 최소 2.5톤/㎡ 수준으로 높아지고 있으며, 전력 밀도에 대한 요구 수준도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냉각 방식 역시 공랭식에서 액체냉각으로 전환되는 흐름이 나타나면서 기존 자산의 사후 보강 비용이 커질 가능성이 있다.
향후 AI GPU 시스템의 피크 전력 요구 수준은 250~1,000kW를 웃돌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기존 전력 분배와 냉각, 하중 기준으로는 하이퍼스케일러의 요구 사양을 충족하기 어려운 자산이 늘어날 수 있다. 설비 보강이 가능한 자산과 구조적 한계로 대응이 어려운 자산 사이의 격차도 더욱 뚜렷해질 가능성이 있다.
이 같은 변화는 단순한 설비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임차인이 요구하는 서버 사양을 수용할 수 있는지, 추가 설비 투자가 필요한지, 그 비용을 임대인과 임차인 중 누가 부담하는지에 따라 자산의 수익성과 매각 가치가 달라질 수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건물의 기본 구조와 핵심 설비만 제공하고 세부 IT 인프라는 임차인이 구축하는 코어앤쉘 방식이나 운영비ㆍ세금ㆍ보험 등을 임차인이 부담하는 트리플넷 리스 구조가 선호되는 경향이 있다. 반면 국내 시장은 전력과 냉각 등 주요 인프라까지 포함해 인도하는 완전 설비형 구조가 상대적으로 보편적이어서 기술 변화에 따른 감가상각과 재투자 부담이 임대인에게 집중될 수 있다.
액체냉각 설비를 추가하거나 전력 분배 구조와 바닥 하중을 보강해야 한다면 이는 향후 매수자의 가격 평가에서 할인 요인이 될 수 있다. 반대로 고밀도 GPU 서버를 수용할 수 있는 설비와 운영 구조를 선제적으로 갖춘 데이터센터는 신규 임차인 유치와 재계약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
김기훈 CBRE 코리아 데이터센터 솔루션팀 상무는 “AI 데이터센터의 경쟁력은 전력 확보에서 시작되지만 장기적인 자산가치는 변화하는 GPU 서버 요구 사양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며 “고밀도 서버 수요가 확대되면서 냉각, 전력 밀도, 하중, 설비 구조는 임대 경쟁력과 재계약 가능성, 향후 자본적 지출 부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는 기술 인프라이자 투자 자산인 만큼 가용 전력뿐 아니라 기술 수명과 설비 대응력까지 포함한 종합적인 투자 검토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전력 확보는 AI 데이터센터 개발의 출발점이지만 이제는 우량 자산을 보장하는 충분조건이 아니다. 앞으로는 냉각, 하중, 전력 밀도, 운영 안정성, 임대차 구조와 재투자 부담까지 종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자산이 임차인과 투자자의 선택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전력만 확보한 자산과 기술 변화에 대응할 설비 경쟁력까지 갖춘 자산 간의 가치 격차는 더욱 벌어질 전망이다.
이원지 기자 news21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