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 차이나] 시제품 다음이 더 어렵다…중국은 왜 '파일럿 검증(中试)'를 공공 인프라로 키우나 [박지민의 비욘드 차이나]

실험실과 양산 사이, 21개 국가급 플랫폼이 만드는 중국식 산업화의 중간역

[테크 차이나] 시제품 다음이 더 어렵다…중국은 왜 '파일럿 검증(中试)'를 공공 인프라로 키우나 [박지민의 비욘드 차이나]

중국 제조업 혁신의 가장 위험한 구간은 연구실도, 대량생산 공장도 아니다. 시제품이 한 번 작동한 뒤 같은 품질로 반복 생산하고, 공정·원가·안전·규제까지 입증해야 하는 중간 구간이다. 중국은 이를 中试(중간시험생산·파일럿 검증)라고 부른다.

파일럿 검증은 단순히 시제품을 조금 더 많이 만드는 과정이 아니다. 설계가 생산조건에서도 유지되는지, 재료와 장비가 공정에 맞는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안정적으로 결합하는지, 작은 생산라인에서 수율과 원가가 감당 가능한지 확인하는 단계다. 연구실에서 한 개를 만드는 기술과 시장에 팔 수 있는 제품을 반복 생산하는 능력은 다르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중국이 파일럿 검증을 공공 인프라로 키우는 이유는 기술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산업이 감당할 수 있는 공정과 비용으로 바꾸기 위해서다.

시제품과 양산 사이에는 다섯 개 검증이 있다

중국 공업정보화부의 2025년 제조업 파일럿 플랫폼 건설지침은 이 중간 구간을 다섯 기능으로 나눈다. 설계검증은 제품 구조와 설곗값이 생산조건에서 유지되는지를 본다. 기능·성능검증은 신뢰성과 환경 적응성을 확인한다. 공정검증은 재료·설비·환경·작업순서가 안정적으로 작동하는지를 시험한다. 적합성 검증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부품과 시스템 호환성을 확인한다. 생산검증은 양산 가능성과 원가 경제성을 판단한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개념검증, 인증, 양산을 서로 혼동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개념검증은 기술이 원리상 작동하는지를 확인한다. 파일럿 검증은 생산할 수 있는지를 확인한다. 시험·인증은 정해진 기준을 통과했는지를 판단한다. 양산은 시장이 요구하는 수량과 가격으로 반복 생산하는 단계다. 중국은 그동안 연구비와 공장투자 사이에 비어 있던 파일럿 검증을 독립된 산업서비스로 만들고 있다.

중국은 왜 지금 파일럿 플랫폼을 국가망으로 묶나

중국 공업정보화부와 국가발전개혁위원회는 2024년 '제조업 파일럿 혁신발전 실시의견'을 내놓았다. 목표는 주요 산업사슬 파일럿 역량을 넓히고, 국제적 수준 플랫폼을 육성하며, 2027년까지 고도화된 서비스체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2025년에는 플랫폼이 '무엇을, 누가, 어떻게' 검증할지를 다시 정의하고, 원재료·장비제조·소비재·정보기술·신흥·미래산업 등 6개 영역 37개 방향으로 범위를 넓혔다.

2026년 7월 기준 중국 제조업 파일럿 서비스망은 21개 국가급 플랫폼, 331개 중점육성 플랫폼, 1800개가 넘는 후보 플랫폼으로 구성된다. 국가급은 핵심거점, 중점육성은 산업별 중간축, 후보 플랫폼은 지역과 세부 업종 저변 역할을 맡는다. 개별 대학과 기업이 운영하던 시험생산설비를 단순 집계하는 데서 나아가, 국가급-중점육성-후보로 이어지는 단계형 네트워크를 만든 것이다.

중국의 제15차 5개년 계획도 개념검증과 파일럿 검증기지 배치를 연구성과 사업화의 핵심 인프라로 다룬다. 파일럿 플랫폼이 더 이상 연구기관의 부속시설이 아니라 산업정책의 독립된 고리가 된 셈이다.

이 정책이 지금 강화되는 배경도 달라졌다. 과거 추격형 제조에서는 해외 공정과 장비를 도입해 생산라인을 복제할 수 있었다. 인공지능 반도체, 전고체전지, 합성생물학, 휴머노이드처럼 아직 정답이 없는 분야에서는 연구개발과 동시에 공정 자체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원천기술 경쟁이 공정설계 경쟁으로 이동하면서 파일럿 역량이 산업의 속도를 좌우하기 시작했다.

‘공공’은 무료가 아니라 공동사용을 뜻한다

파일럿 설비는 비싸고 업종별 전문성이 강하다. 반도체는 클린룸과 공정·패키징·신뢰성 장비가 필요하고, 바이오는 배양·정제·충전·품질관리 시설이 필요하다. 신소재는 배합과 열처리, 극한 환경시험이 필요하고, 로봇은 관절·구동기·본체 조립과 실제 작업환경 검증이 필요하다. 초기기업이 이 모든 설비를 직접 갖추면 제품을 팔기도 전에 자본이 소진된다.

중국이 말하는 공공 플랫폼은 정부가 무료로 운영하는 시설만을 뜻하지 않는다. 대기업, 대학·연구기관, 제조업혁신센터, 전문 서비스기업이 건설 주체가 될 수 있다. 대신 외부 기업과 연구팀에 설비와 전문인력을 개방하고, 설계·공정·적합성·소량생산·시험평가를 유료서비스로 제공해야 한다. 정부는 토지와 건설비, 장비, 인재를 지원하되 플랫폼은 안정적인 서비스 매출을 확보하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파일럿 플랫폼의 진짜 생산물은 시제품만이 아니다. 반복 가능한 공정조건, 수율과 원가 데이터, 시험보고서, 성숙한 공정패키지, 인증과 고객검증에 사용할 소량제품이 함께 나와야 한다. 산업화 불확실성을 데이터로 줄이는 곳이 파일럿 플랫폼이다.

플랫폼 운영 주체도 세 유형으로 나뉜다. 선도기업형은 실제 생산설비와 고객망을 갖고 있어 공정개선과 양산 전환이 빠르지만, 경쟁사 기술을 다루는 데 이해상충이 생길 수 있다. 대학·연구기관형은 원천기술과 분석장비가 강하지만 시장수요와 원가관리 역량이 약할 수 있다. 전문 서비스기업형은 여러 고객을 상대하며 공정·인증·투자를 묶기 쉽지만, 초기에는 대규모 장비 투자를 감당하기 어렵다. 중국 정부가 단일 주체를 정답으로 두지 않고 산업별로 서로 다른 건설모델을 허용하는 이유다.

좋은 플랫폼은 연구자 기술을 대신 소유하는 곳이 아니다. 고객기업이 요구하는 생산조건을 정의하고, 실패원인을 기록하며, 필요하면 설비업체·소재업체·인증기관과 금융기관을 함께 불러오는 산업조정자다. 플랫폼 가치는 장비 가격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실패를 더 싸고 빠르게 발견해 양산 단계의 손실을 줄였는지에서 결정된다.

로봇·바이오·반도체가 같은 플랫폼을 필요로 하는 이유

베이징휴머노이드로봇혁신센터(北京人形机器人创新中心) 파일럿 검증 플랫폼은 중국이 미래산업에서 무엇을 검증하려는지 보여준다. 2025년 완공돼 2026년 본격 운영에 들어간 이 시설은 약 9700㎡ 규모로, 대학·연구기관·기업에 개방된다. 시제품 제작, 성능·공정 검증, 공정 최적화, 기능모듈과 완제품 조립, 시험평가를 한 곳에서 제공한다. 연간 500대·세트의 시험생산·검증과 5000대 규모 휴머노이드 생산 준비능력을 갖춘 것으로 소개됐다.

휴머노이드 병목은 시연 영상이 아니다. 관절 조립오차, 배선, 열관리, 낙상과 충돌안전, 부품 편차,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이후 안정성을 반복 검증해야 한다. 선전의 러쥐로봇(乐聚智能)도 파일럿 라인에서 소량생산과 공정 표준화를 거친 뒤 포산의 대량생산라인으로 넘기는 '선전 연구개발·파일럿-포산 양산' 구조를 만들었다.

바이오 분야에서는 중국의학과학원 의학생물학연구소(中国医学科学院医学生物学研究所) 바이오의약품 전환 파일럿 플랫폼이 첫 국가급 명단에 포함됐다. 약 1만8000㎡의 시설에 서로 다른 규모의 바이오리액터, 발효·정제·충전·동결건조 장비를 갖추고 GLP·CNAS·CMA 등 시험·품질 자격을 연결한다. 연구실 배양조건을 생산 규모로 키우는 과정에서 수율과 불순물, 안정성, 규제문서를 함께 검증하는 구조다.

첫 국가급 21개 플랫폼은 집적회로, 첨단소재, 계측기기, 통신장비, 산업용 공작기계 등으로 퍼져 있다. 서로 다른 산업이 같은 정책에 묶이는 이유는 공통적이다. 기술위험이 공정위험으로 바뀌는 순간, 개별 스타트업 연구비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도시정부는 건설비를 내고, 금융은 실패위험을 나눈다

중앙정부가 네트워크와 기준을 만들면 지방정부는 산업에 맞는 플랫폼을 건설한다. 베이징은 2030년까지 국가급 플랫폼 10개와 시급 플랫폼 50개를 목표로 한다. 인공지능·의료건강·로봇·신소재·집적회로 등 신규 플랫폼에는 프로젝트 총투자액의 일정 비율을 지원하고, 한도는 분야에 따라 최대 약 1472만달러에 이른다. 플랫폼을 산업단지와 선도기업, 대학 연구성과에 연결해 도시의 공통 생산설비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문제는 운영자금이다. 파일럿은 공정이 계속 바뀌어 가동률과 매출을 예측하기 어렵고, 장비고장·연구중단·제품책임 위험도 크다. 중국은행과 중국인민보험은 '2025년 파일럿 검증 보험·금융 연계(中试保融通)'를 내놓고, 3년간 은행대출 약 147억달러와 보험보장 약 147억달러를 제공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광둥의 한 반도체 미세가공 플랫폼은 일반 재무제표만으로 대출받기 어려웠지만, 기술역량과 산업파급효과를 평가하는 별도 모형을 통해 약 5890만달러, 12년 만기 금융지원을 받았다. 저장성 다이산의 바이오 기반 신소재 프로젝트에는 대출·보험·지방정부 보험료 지원을 결합했다. 중국은 파일럿 설비를 단순 보조금 대상이 아니라 대출·보험·투자를 결합할 수 있는 산업자산으로 바꾸려 한다.

공공 플랫폼이 많아질수록 생기는 네 가지 병목

중국 시스템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첫째는 중복건설이다. 모든 도시가 인공지능·로봇·바이오 플랫폼을 만들면 설비가 놀고 전문인력이 분산된다. 공업정보화부가 2025년 지침에서 무분별한 건설과 '출혈경쟁'을 피하라고 명시한 이유다.

둘째는 공공성이다. 대기업이 자기 제품개발용 라인을 국가 플랫폼으로 포장하면 중소기업은 시간과 가격에서 밀릴 수 있다. 외부 서비스 비중, 이용기업 수, 중소기업 접근성과 서비스 매출을 공개해야 한다.

셋째는 지식재산권과 데이터다. 공정 조건과 실패 데이터는 기업 핵심 자산이다. 공동장비를 쓰면서 정보가 선도기업이나 다른 입주기업으로 흘러갈 수 있다. 비밀유지, 데이터 격리, 장비 로그 소유권, 플랫폼 연구자 이해상충 규칙이 필요하다.

넷째는 책임이다. 파일럿 결과가 양산에서 재현되지 않거나 시험제품이 사고를 내면 플랫폼, 기업, 인증기관 가운데 누가 책임질지 불명확할 수 있다. 중국이 2027년까지 파일럿 관련 표준 50개 이상, 2030년까지 100개 이상을 만들려는 이유도 서비스 품질과 책임의 공통언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연구비 다음의 공장’을 설계해야 한다

한국에도 테크노파크, 공공연구기관, 전문생산기술연구소, 메이커스페이스, 산업혁신기반구축사업과 스케일업 기술사업화 프로그램이 있다. 문제는 시설이 없어서라기보다 연구비·장비·실증·인증·첫 고객이 기관별로 나뉘어 있다는 데 있다.

정부는 먼저 전국 파일럿 설비를 업종·공정·수용량·가격·보유인증 기준으로 공개해야 한다. 모든 지역에 같은 시설을 짓기보다 반도체, 바이오, 로봇, 배터리, 조선·해양처럼 광역권별로 집중하고 다른 지역 기업도 동일 조건으로 이용하게 해야 한다.

지자체는 건물보다 가동률과 산업성과를 봐야 한다. 플랫폼 평가는 입주기업 수가 아니라 외부기업 이용률, 공정검증 완료율, 인증·첫 구매 전환율, 후속 민간투자와 양산매출로 바꿔야 한다.

대학과 연구기관은 특허와 시제품을 넘기는 데서 끝나지 말고 공정패키지와 재현성 데이터를 만들어야 한다. 대기업은 멘토링보다 시험생산라인, 엔지니어, 구매기준과 조건부 첫 주문을 열어야 한다. 금융권은 담보와 과거매출 대신 플랫폼의 검증데이터, 대기업 구매의향, 보험과 정책기관의 위험분담을 결합한 장기상품을 설계할 수 있다.

스타트업은 가장 싼 설비보다 독립성·보안·전문인력·후속 고객 연결을 봐야 한다. 한국 기업이 중국 현지 파일럿 플랫폼을 이용할 때도 현지 인증과 공급망 진입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공정데이터·개량기술·샘플 귀속과 중국 내 데이터 저장조건을 계약으로 분리해야 한다.

중국 강점은 플랫폼을 빠르게 깔고 도시 산업정책·금융·공급망과 연결하는 동원력이다. 병목은 중복투자, 공공성, 지식재산권과 책임 규칙이다. 한국 강점은 정밀제조, 대기업 고객, 시험인증기관과 비교적 투명한 계약체계다. 병목은 각 시설과 지원사업이 하나의 기술성장 경로로 연결되지 않는 데 있다.

연구실에서 작동하는 기술은 아직 산업이 아니다. 첫 생산라인에서 같은 품질과 원가를 반복해낼 때 비로소 시장 언어를 얻는다. 한국은 연구비가 끝난 기술에 또 다른 연구비를 붙일 것인가. 아니면 파일럿 검증을 공공 산업 인프라로 만들고, 기술이 첫 생산라인과 첫 고객을 통과하도록 설계할 것인가.

김현민 기자 minkim@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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