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0년간 우리나라 인재 양성 정책을 시간순으로 복기하면 우리 산업 변천사도 그대로 복원된다. 소프트웨어(SW) 인력이 부족에 대규모 SW 인력 양성사업이 나왔고, 디지털 전환이 화두가 되자 '디지털'을 붙인 학과가 잇따라 생겨났다. 빅데이터 유행에 빅데이터학과가, 창업이 국정 과제가 되자 창업학과와 창업대학원이 만들어졌다. 지금은 인공지능(AI)과 반도체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유행에 따라 조직을 새로 만드는 대응은 시대 변화를 뒤쫓는 한계를 드러낸다. 학과를 만들고 첫 졸업생이 나오기까지 4~5년이 걸린다. 그 사이 기술과 기업이 요구하는 세부 역량은 다시 바뀐다.
이러한 정책적 한계는 '지표의 함정'에서 비롯된다. 현재 인재 정책 성과는 신설 학과 수, 확보한 정원, 배정 예산처럼 숫자로 평가한다. 측정 가능한 성과가 평가와 보상의 기준이 되면 숫자를 채우는 일이 목적이 되고, 인재 양성의 본질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개인 의도와 관계없이 작동하는 정책의 유인 구조다.
악순환을 깨는 힌트가 역설적이게도 AI에 있다. 오늘날 많은 AI 모델이 다양하고 광범위한 자료를 학습하고 필요한 분야에 맞춰 추가 훈련을 거친다. 처음부터 특정 분야에 특화한 AI 모델과 달리 넓은 학습 기반을 갖춘 AI 모델은 새로운 과제에 적응할 가능성이 크다.
인재 양성도 비슷하다. 기초학문은 사고의 바탕이고, 직무 기술은 그 위에 더해지는 능력이다. 기초가 부족한 인재는 산업의 방향이 바뀌면 다른 분야로 이동하기 어렵다. 기술 변화가 빠르고 미래 예측이 어려울수록 특정 분야의 지식뿐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확장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이 중요하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언제든 다른 분야로 전환할 수 있는 토대인 기초학문의 가치 또한 더욱 커진다.
AI 시대 인재는 무엇을 물을지 정하고 AI의 답을 판단하며 서로 다른 분야를 연결할 수 있는 역량이 핵심이다. 이러한 역량은 단기 교육이 아니라 깊이 있는 학문적 훈련과 다양한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인재 양성 정책의 지향점을 바꿔야 한다. 첨단 분야의 정원을 늘리는 단기 처방에서 벗어나 기초학문을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유행을 타는 분야와 그렇지 않은 분야를 동일한 단기 성과 지표로 평가하는 한, 기초학문은 언제나 불리할 수밖에 없다.
조직을 새로 만드는 외형적 확대를 넘어 교육과정의 유연한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새로운 학과나 단과대학을 설립하는 데 수년이 걸린다면, 기존 체제 위에 AI·데이터·문제 해결 관련 융합 교육과정을 더하는 편이 빠르고 효율적이다.
중요한 것은 학과의 이름이 아니라, 학생이 변화에 맞춰 계속 배울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열어두는 일이다. 대학은 산업의 유행을 뒤따르는 곳이 아니라, 변화의 방향을 읽고 사회가 준비할 시간을 벌어주는 곳이다.
기업 채용 기준도 변해야 한다. AI가 답을 쏟아내는 시대에 기업이 원하는 인재는 그 답이 옳은지 되묻고, 다른 가능성을 찾아 문제의 방향 자체를 다시 설정할 수 있는 사람이다. 기업 또한 인문학과 자연과학, 기초공학을 두루 공부한 인재의 전환 적응력이나 통찰력에 주목해야 한다.
'예측 정확도를 높이는 설계보다 그 예측이 틀리더라도 시스템이 급격히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설계가 중요하다.' 공학이 주는 오래된 교훈이다.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향후 10년 유행할 신설 학과 목록이 아니다. 예측이 빗나가도 스스로 다음 길을 찾아갈 수 있는, 기초 체력과 전환 능력을 길러줄 수 있는 유연한 교육 체제다.
AI 혼돈의 시대에 교육의 역할은 정답을 빠르게 많이 찾는 것이 아니라 정답이 바뀌어도 다시 질문하고, 다시 배우며, 새로운 길을 찾아갈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일이다.
서용철 국립부경대 공과대학 학장 suh@pk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