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부장 인사이트] 美 블랙매스 수출통제, 배터리 리사이클링의 전환점

박정호 아이에스에코솔루션 대표
박정호 아이에스에코솔루션 대표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이 폐배터리 재활용 핵심 중간재인 '블랙매스(BM)'의 해외 수출을 1년간 사실상 틀어막았다. 자국 내 거래를 강제해 핵심 광물의 외부 유출을 막고, 중국의 자원 무기화에 맞서 배터리 공급망 안보를 지키겠다는 명분이다.

미국산 BM 확보에 비상이 걸린 국내 재활용 업계는 규제 파장을 분석하느라 분주하다. 겉으로 보면 촘촘한 자국 산업 보호책 같지만, 현장의 배터리 리사이클링 생태계를 조금만 뜯어보면 이번 조치는 치명적인 '공급망 미스매치'와 '정책의 역설'을 안고 있다.

컬럼비아대 글로벌에너지정책연구소(CGEP) 분석에 따르면, 미국 내 재활용 설비용량 대비 실제 현장에서 확보 가능한 폐배터리 물량은 26% 수준에 불과하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 혜택을 노리고 배터리를 뜯고 부수는 전처리(BM 제조) 공장은 우후죽순 늘어났지만, 고난도 화학 공정을 거쳐 원자재를 뽑아내는 후처리(습식제련) 인프라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결국 갈 곳 잃은 BM이 미국 내에 쌓이면서 전처리 업체들은 도산 위기에 몰리고, 후처리 투자자들은 원료수급과 채산성 문제로 선뜻 발을 들이지 못하는 기형적 병목 현상이 벌어질게 불을 보듯 뻔하다.

하지만 미국의 이 원재료 병목은 우리 산업계에 오히려 결정적인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중국이 희토류 수출 통제와 역외 규정을 강화하며 자원을 쥐고 흔드는 지금, 글로벌 자원 전쟁의 무게중심은 '누가 땅속 광물을 많이 쥐고 있는가'에서 이를 순도 높게 정제하고 가공하는 '공정 기술'의 싸움으로 완전히 옮겨갔다.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자칫 샌드위치가 될 수 있는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제련·정제 기술력을 앞세워 글로벌 자원순환 체계의 핵심 허브로 치고 나갈 판이 깔린 셈이다.

이를 현실로 만들려면 민관이 손잡고 세 가지 전략을 밀어붙여야 한다.

첫째, 정부 차원의 전략적 통상 외교를 통한 '한·미 글로벌 리사이클링 벨트' 구축이다.

미국 BIS 규정에는 현지 처리 한계로 산업 피해가 입증될 경우 예외 승인(Exemption)을 내주는 통로가 열려 있다. 정부는 이 틈을 파고들어야 한다. 미국 내에서 처리하지 못해 썩어가는 BM을 한국의 고도화된 처리시설 및 습식제련 공장으로 들여와 정제한 뒤, 다시 미국 IRA 기준에 맞춰 북미 완성차 공급망으로 돌려보내는 '위탁 제련 및 교환(Tolling/Off-take)' 방식을 공식 통상 의제로 올려야 한다. 양국 간 순환자원 안보 특례 조항을 이끌어 내 제도화된 기술-원자재 동맹을 맺는 것이 급선무다.

둘째, 기업 차원의 영리한 현지화와 규제 회피형 원료 다변화다.

국내 리사이클링 기업들은 미국 현지 법인을 통해 'U.S. Person' 자격을 갖춰 현지 BM 수급권을 쥐는 동시에, 북미 완성차(OEM) 및 셀 제조사와의 합작법인(JV)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한국의 독보적인 전처리 및 친환경 습식제련 기술을 수혈해 미국의 빈약한 후처리 생태계를 완성해 주는 대신, IRA 세제 혜택과 핵심 광물 지분을 챙기는 실리 중심의 판을 짜야 한다.

아울러 미 규제가 '가루 형태의 BM'에 묶여 있다는 점을 파고들어 팩이나 모듈 단위의 스크랩 확보 경로를 넓히고, 동남아·유럽·남미 등으로 공급선을 다변화해 리스크를 분산해야 한다.

셋째, 국가 차원의 과감한 기술 안보 입법과 지원책이다.

2010년 중·일 희토류 분쟁 당시 일본이 도시광산 육성과 대체기술 개발로 대중 의존도를 꺾어냈던 경험을 되새겨야 한다. 우리 정부 역시 친환경 저탄소 습식제련, 고순도 흑연 회수,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직접 재활용 기술을 '국가첨단전략기술'로 신속히 지정해야 마땅하다. 재활용 보조금 신설, 연구개발(R&D) 세액공제, 공장 신·증설 인허가 패스트트랙 같은 실효성 있는 혜택이 현장에 즉각 꽂혀야 기업들이 속도를 낼 수 있다.

자원 패권 전쟁의 향방을 가르는 것은 결국 축적된 '엔지니어링 기술'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수출 통제는 당장 글로벌 공급망에 적잖은 파장을 주겠지만, 정제 기술력을 쥔 대한민국 배터리 산업에는 밸류체인의 최상단을 차지할 기회다.

정부의 기민한 협상력과 기업의 과감한 현지 투자가 한 템포로 맞아떨어진다면, 한국은 단순한 제조국을 넘어 글로벌 배터리 순환 생태계를 좌우하는 대체 불가능한 주역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박정호 아이에스에코솔루션 대표 jh_park@isecosolut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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