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료방송 가입자들은 200개가 넘는 채널 앞에서도 늘 “볼 게 없다”고 토로한다. 이러한 불만의 원인을 넷플릭스나 유튜브 같은 OTT의 약진에서 찾곤 한다. 그러나 시청자의 피로감이 유독 TV 플랫폼에서 극에 달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한정된 프로그램을 계열 채널마다 무한 복제해 송출하는 비정상적인 '중복 편성' 때문이다.
그 실태를 들여다보면 시청자가 왜 “채널마다 같은 것만 나온다”고 느끼는지 명확해진다. 업계 집계에 따르면 최근 방영작인 드라마 '유부녀 킬러'의 경우, 지난 8월 주말 이틀(22~23일) 동안 5개 채널에서 무려 57회나 방영됐다. 당시 공개된 단 3개 회차(6~8회)를 한 회차당 19번씩 채널을 바꿔가며 돌려 튼 셈이다. 어디 이뿐인가. 스테디셀러 예능인 '나는 자연인이다'는 같은 기간 24개 채널에서 총 181회가 쏟아져 나왔다. 채널 번호는 제각각이지만 틀어놓은 콘텐츠는 사실상 똑같다.
주요 복수채널사용사업자(MPP) 9개사의 43개 채널을 비교한 결과, 같은 계열 안에서 편성이 겹치는 채널 간 중복률은 최대 98%에 달했다. 실질적으로 1개 채널에 불과한 콘텐츠를 3개 채널로 쪼개어 포장한 것이다. 재방송으로 도배된 중복 채널은 새 콘텐츠를 공급하기보다 단순히 광고 지면을 늘리는 기능에 가깝다. 채널 번호와 시청률을 기반으로 광고 수익을 얻으면서도, 명목상 3개 채널이라는 이유로 콘텐츠 사용료가 함께 지급되는 구조다.
시청자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이런 채널을 유료방송사가 편성표에서 제외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형 MPP의 '끼워팔기' 때문이다. 계약서에는 채널별 사용료가 분리되어 있어 겉으로는 개별 계약처럼 보이지만, 유료방송사가 비주력 채널을 빼고 인기 주력 채널만 계약하겠다고 요구하면 MPP는 “모든 채널의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맞선다.
양측의 협상력은 애초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채널 판매 시장에서 1위 대형 MPP의 점유율은 27%에 달하는 반면, 케이블TV 사업자는 90개사를 다 합쳐도 15%에 불과하며 개별 사업자는 0.5% 수준에 그친다. 주력 채널이 끊기면 가입자 이탈로 당장 존립이 흔들리는 유료방송사와 달리, 대형 사업자는 공급을 중단해도 전국 매출의 극히 일부만 타격을 입는다. 실제로 지난해 말 대형 MPP가 케이블 사업자를 상대로 전격적인 송출 중단(블랙아웃)을 단행했던 배경이다. 이러한 비대칭 속에서 케이블TV의 총수신료 대비 프로그램 사용료 지급률은 2024년 기준 90.2%까지 치솟았다. IPTV(45.8%)의 두 배에 달하는 비정상적인 수치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묶음 판매 강요가 이미 2012년 정부 가이드라인을 통해 금지된 불공정행위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유료방송사가 이러한 채널의 계약 종료를 신고하면, 규제 당국은 '사업자 간 합의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수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대가는 고스란히 방송 생태계 전체로 전가된다. 자체 제작에 힘쓰는 신규·독립 채널들이 설 자리를 잃었다. 실제로 중소 채널사용사업자(PP) 116개사의 매출 점유율은 지난 5년간 9.9% 수준에 갇혀 있다.
제작비 상승을 반영한 콘텐츠 제값 주기는 마땅히 지켜져야 한다. 결코 우수한 콘텐츠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깎자는 주장이 아니다. 문제는 구매자가 필요 없는 상품을 거부할 권리조차 박탈당한 왜곡된 거래 방식에 있다.
해결을 위해 새로운 법을 만들 필요도 없다. 이미 존재하는 원칙을 제대로 작동시키면 된다. 첫째, 정부는 2012년 가이드라인에 명시된 '끼워팔기 금지' 규범의 준수 여부를 철저히 점검하고, 위반 사업자에게 방송법상 과징금(매출액의 2% 이내) 등 실효성 있는 제재를 상시 발동해야 한다. 둘째, 대형 사업자가 채널별 개별 계약을 거부하며, 채널 종료의 사유로 인정하도록 심사 요건을 현실화해야 한다. 셋째, 규제기관이 계열 채널 간 중복편성 비율과 '실질 채널 수'를 매년 정기적으로 산출해 공표하고, 이를 채널 평가와 대가 산정의 핵심 지표로 반영해야 한다.
채널을 아무리 돌려도 방금 본 장면이 반복되는 TV를 시청자에게 계속 보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시장의 공정한 룰을 세우는 일, 지금 정부가 즉각 착수해야 할 과제다.
유성진 숭실대 경영학부 교수 sjyoo@ss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