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열한 경쟁과 성과의 압박, 갈등과 불안의 언어가 넘쳐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은 늘 고단하다. 불교는 우리가 겪는 삶의 실재적 부조화와 고통, 즉 '고(苦·Duhkha)'의 원인이 외부 환경이 아닌 특정 대상을 바라보는 우리 내부의 인식 구조와 오염된 마음에 있다고 진단한다. 고통을 낳는 인식의 메커니즘을 추적하고 여기에 지혜로움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고통이라는 족쇄를 끊어버릴 수는 없을까?
고통이 형성되는 출발점은 인간의 인식 체계인 '오온(五蘊)'이다. 신체적 감각(색), 느낌(수), 개념화(상), 의지(행), 분별 의식(식)이 작동할 때, 인간은 오온 중 상(想)과 식(識)을 통해 고정된 실체라는 환상을 만들고 여기에 행(行·집착)을 더해 집착의 덩어리(오취온(五取蘊))로 변질시킨다. 이 인식적 착각의 정점에 '사상(四相: 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 존재한다. 나라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아상(我相)을 원형으로 하여, 타인과의 대립(인상), 집단적 범주화(중생상), 존재의 지속성에 대한 집착(수자상)이 아상을 끊임없이 부추기고 강화한다. 아상이 상할 때 분노(진·瞋)가 일어나고, 아상을 채우려 할 때 탐욕(탐·貪)이 발생하며, 그 기저에는 무지(치·癡)가 자리한다. 결국 '나라는 단단한 실체가 있다'는 착각이 모든 고통의 근본 원인이다.
이 고통의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금강경'은 '즉비시명(卽非是名)'이라는 3단계 인식 프레임을 제시한다.“A는 곧 A가 아니요(卽非A), 그 이름이 A일 뿐이다(是名A).”이 말의 뜻은 이렇다. 1단계(A)는 특정 사물이나 현상 등을 고정된 실체로 믿고 집착하는 상식(常識)의 단계이며, 2단계(卽非 A)는 그러한 것들이 인연(因緣) 따라 모인 일시적 현상일 뿐 자성(自性)이 없음을 깨달아 사상(四相)을 파쇄하는 공(空)의 단계다. 마지막 3단계 (是名 A)는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현실과 소통을 위해 이름을 유연하게 차용하는 중도(中道)의 단계다.
성철(性徹) 스님의 법어(法語)로 가장 잘 알려진 명언 중 하나인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말이 그렇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미망과 집착을 넘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라는 파상(破相)의 단계를 거쳐 결국에는 “산은 다름 아닌 산이요, 물은 다름 아닌 물이다”라며 관념의 틀마저 내려놓고 산과 물, 이웃의 존재를 어떠한 집착 없이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중도(中道)적 회복에 이르른 위대함의 극치다.
동서양의 수많은 사상이 존재와 인식의 한계를 돌파하고자 했으나, '즉비시명(卽非是名)'이라는 가르침은 독보적인 실천적 위대함을 지닌다. 노자(老子)는 '도가도비상도'로 언어의 한계를 선언했으나 관념을 해체하는 구체적 방법론이 미비했던 반면, 즉비시명은 정밀한 3단계 해체 공식을 제시한다. 서양 신학은 절대자 신과 피조물이라는 주객(主客) 이분법에 의존하여 아상의 구조를 파쇄하지 못하지만, 즉비시명은 부처라는 성스러운 관념마저 베어내며 주체적 해탈을 이룬다. 그리고, 칸트(I. Kant)는 본질인 '물자체(物自體)'의 인식 불가능성을 선언하며 현상과 본질을 단절시킴으로써 즉비(卽非) 단계까지 이르렀으나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불교는 '물자체라는 고정된 알맹이 자체가 비어있다(空)'는 깨달음을 통해 현상 그 자체가 곧 연기적 실상(是名)임을 밝혀낸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것을 움켜쥐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내면을 옥죄는 '아상(我相)'의 환상을 내려놓는 지혜다. 우리가 아상의 고리를 끊어내고 즉비시명의 지혜로 세상을 바라볼 때, 내 앞의 업무는 인연 따라 마땅히 수행할 삶의 현장이 되고, 이웃은 함께 숨 쉬는 연기적 존재로 다가오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일상의 풍경이 집착 없는 참자유로 빛나기 시작한다. 내 안의 집착을 비우고(卽非), 세상과 유연하게 소통하며 자비를 베푸는 것(是名). 이것이 바로 수천 년이라는 세월의 강을 건너와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 시민들에게 건네는 깨어남의 초대장이다.
이강우 동국대 컴퓨터AI학부 교수 klee@dongguk.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