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수 칼럼] 정부 관료만 무시하는 시장원리

 사흘 만에 5000대 매진. 3개월에 8068대 판매. 앞은 이마트가 내놓은 반값 TV다. 뒤는 방송통신위원회가 추진하는 보급형 디지털TV다. 32인치 이마트 TV는 49만9000원이다. 대만 업체가 만든 풀HD LED TV다. 삼성전자, LG전자의 동급 제품보다 40% 정도 싸다. 소비자 호응이 뜨거울 수밖에 없다.

 보급형 디지털TV는 정부가 디지털 방송 전환에 맞춰 기획했다. 23인치, 32인치, 42인치가 있다. 국내 기업들이 생산한다. 32인치는 45만5000원과 49만원이다. HD급 LCD TV다. 이마트 TV보다 더 좋은 점을 찾기 힘들다. 정부 보조금 10만원을 받는 취약계층에겐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런데 번거롭다. 보조금 지원대상임을 확인받아야 한다. 신청도 해야 한다. 정해진 제품만 사야 한다. 보급형 DTV 구매자 중에 취약계층이 4분의 1밖에 안 되는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업계는 애초부터 무리수라고 했다. 취약계층에게 그냥 보조금만 주면 될 것을 왜 제품을 한정하느냐 말이 많았다. LCD 값이 내려 DTV 값도 떨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강행했다. 결과는 초라했다. 이마트 TV는 중간 유통과정 생략과 부품값 하락으로 가능했다. OEM 업체는 이윤이 줄었지만 많이 팔고 확실한 판로를 확보할 수 있어 이익이다. 결국 정부가 할 일을 이마트가 대신한 셈이다.

 토종 모바일 운용체계(OS) 개발이 백지화됐다. 구글의 모토로라 인수로 모바일 OS의 중요성이 부각되자 지식경제부가 이 계획을 내놓았다. 업계는 “정부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했다. 옛 ‘K도스’까지 거론해 말렸지만 정부는 고집을 부렸다. 업계, 연구기관 할 것 없이 반대하자 결국 뜻을 접었다.

 모바일 OS가 중요하다지만 지금은 ‘멀티 플랫폼’ 시대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심지어 삼성전자 것까지 빌려 쓸 수 있다. 그런데 새 OS를 만들겠다니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발상이다. 생각보다 빨리 고집을 접은 게 되레 놀랍다. 관료들 귀가 조금 커진 것일까.

 ‘수수료 정국’이다. 백화점, 신용카드, 은행의 비싼 수수료에 대한 불만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정부는 낮추라고 압박하고 업계는 반발한다. 손쉽게 수수료 장사를 하는 업체들을 두둔할 생각은 전혀 없다.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시장 경제 체제다. 수수료 역시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수요공급에 의해 결정된다. 정부가 심각한 문제라고 판단했다면 그 수급 구조를 개선할 장치를 마련하는 게 우선이다. 정부는 이를 제쳐두고 업계만 윽박지른다. 업계는 ‘억지 춘향’처럼 찔끔 낮춘다. 소비자 불만은 그대로다. 정부는 소비자 고통을 덜어줬다고 생색만 낸다.

 관료들은 똑똑한 사람들이다. 고시에 합격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일반인도 아는 시장 원리를 모를 리 없다. 업계 한두 사람에게 물어봐도 알 수 있다. 관료들에게 없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철학이다. 당장 닥쳐온 불만과 비판을 모면하는 데 온 신경이 가 있다. 한 관료가 시장원리에 맞게 구조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해당 조직과 인사 문화는 이를 알아주지도,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 내년도 크게 달라질 게 없다. 살림살이가 나빠지면 국민 불만도 커진다. 내년엔 총선, 대선까지 있다. 정부의 시장 개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한결 높아질 것이다. 통신, 전기, 기름 등 각종 요금 인하 요구가 들끓을 것이다. 관료들 역시 손쉽고도 스스로의 힘을 과시할 수단에 유혹을 느낀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시장이 왜곡되면 고치기도 어렵거니와 비용이 더 든다. 그 폐해는 궁극적으로 소비자에게 간다. 정작 관료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정치인은 표라는 심판이라도 받는데 말이다.

 신화수 논설실장 hssh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