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IT기업들이 경기불황을 이유로 보류한 한국에 대한 투자를 재개하지 않으면서 중국에 대한 투자를 확대, 대 중국 전진기지로 자리매김했던 한국의 위상이 추락할 위기에 직면했다. 이에 따라 중국과 차별화한 고부가가치 기술 중심의 투자유치 전략 수립과 이를 위한 정부의 정책적 결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2일 업계에 따르면 반도체와 통신 등 첨단 분야의 다국적 외국계 IT기업들은 세계무역기구(WTO)가입을 계기로 중국이 향후 5년내 세계 IT시장의 2, 3위권 내에 진입할 것으로 보고 현지법인 설립, 설비투자, 기술이전 등의 대 아시아 투자전략을 중국 중심으로 다시 짜고 있다.
이 과정에서 IMF를 전후로 외국 투자를 활발히 유치했던 한국은 다시 투자의 변두리 국가로 밀려나고 있으며 이대로 가다가는 신규 투자 유치는 물론 기존에 유치한 투자마저 중국에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국내의 반도체 생산공장(FAB) 및 인력을 인수해간 페어차일드·앰코·칩팩·ASE 등 다국적 반도체업체들은 지난해부터 시작된 반도체시장 불황으로 한국내 추가 설비투자나 자금지원을 전면 유보하는 대신 중국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 현지공장을 인수하거나 설립을 추진중이다.
에릭슨·모토로라 등 세계적인 통신장비업체들은 한국에 대한 투자보다는 중국에 대한 전폭적인 투자를 통해 시장진출 의지를 다지고 있다.
더구나 가격경쟁이 치열한 후공정 업체들의 경우 원가절감을 위해 인건비가 싼 중국으로 저가제품 생산라인을 모두 중국으로 이전키로 하고 한국공장의 설비를 옮겨가 ‘산업 공동화’의 우려까지 낳고 있다.
아남반도체의 패키징 공장을 인수한 앰코는 지난 9월 상하이 푸둥지구에 주당 30만개의 생산능력을 지닌 패키징 및 테스트 공장 가동에 들어가면서 한국에서 생산하고 있는 CABGA·LQFP·SIP 등 아날로그IC 제품군을 중국공장으로 통합키로 했다. 대신 이 회사는 한국공장에서 스택다이·멀티칩패키지 등 소품종 고가제품 생산에 주력키로 했다.
지난 98년 현대전자의 패키징공장을 인수한 미국 칩팩 역시 한국공장에서 생산해 온 대부분의 저가 제품군을 중국 상하이 청포공장으로 이전하고 1000여명의 인력조정도 끝냈다. 이 회사는 중국공장에서 월 20만개 규모의 리디드패키지 등 저가제품을 생산하고 한국공장에선 칩스케일패키지(CSP)·플립칩패키지 등 고부가가치 제품군을 조달할 계획이다.
스웨덴 에릭슨은 오는 2005년까지 중국에 24억∼51억달러를 투자키로 하고 그 가운데 중국 기업들의 연구개발 및 인력 재교육에 2억9000만∼5억7200만달러를 투입키로 한 데 반해 한국에서는 네트워크장비업체인 쓰리아이씨에 3000만달러를 투자한 게 전부다.
모토로라는 최근들어 한국에 대한 투자보다는 중국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는데 지난 87년 이후로 중국에 34억달러를 투자해 8개 합작사, 26개 지사, 18개 연구개발센터를 운용중이다.
물론 한국투자를 늘리는 다국적 기업들도 있다. 중국 쑤저우에 후공정 공장 설립을 추진중인 페어차일드는 한국공장을 중국까지 포함한 대아시아 전략기지로 육성할 계획이다. 커크 폰드 페어차일드 회장은 “한국공장은 아시아지역의 전력용 반도체시장 점유율을 40%에서 70%로 늘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면서 “세계적인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한국과 중국을 병행한 전략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우리의 외국투자 유치 전략도 중국과의 역학관계를 감안해 생산보다는 기술과 연구개발 위주로 전환해야 하며 이를 위한 정책개선과 행정서비스도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지연기자 jyjung@etnews.co.kr 이은용기자 ey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