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7년 여름. 나는 리튬폴리머전지를 개발 양산하는 말레이시아의 한 업체를 알게 됐다. 슈빌라 배터리라는 이 회사는 당시 리튬이온전지가 상업적으로 양산된 지 불과 2∼3년이 지난 시점에 차세대 전지를 생산하는 기술을 확보하고 있었다.
슈빌라로부터 국내 독점 영업권을 확보한 브이케이(당시 바이어블코리아)는 이 기술을 인정하고 상업화할 수 있는 업체를 찾았다.당시 휴대폰 단말기의 주요 생산업체는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전자 등 대기업이었고 각 회사의 휴대폰 제품에 맞는 샘플을 제작했다.
현대전자와 LG전자는 사업장이 서울 인근에 있었던 관계로 쉽게 만나서 제품소개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구미에 사업장이 있어서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구미공장에 도착해 제품 소개를 마친 나는 큰 고민을 안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독점공급 요구였다.
사실 삼성전자가 얼마나 제품을 사줄지도 미지수였고 섣불리 독점계약을 맺었다가 가까운 장래에 낭패를 볼 수도 있을 것이란 걱정도 됐다. 그러나 구미 공장에서 만난 실무자들의 신기술에 대한 열정과 업무추진 책임감을 보고 마음을 결정하게 됐다. 이런 사람들과 일을 한다면 잘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구미공장의 실무자들은 같이 일하기에 최상의 파트너라는 느낌이 들어 과감하게 삼성이 요구하는 독점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삼성과의 독점공급 계약으로 인해 우리는 우선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영업을 포함한 다른 사업기획의 영역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세계에서 처음으로 휴대폰 단말기에 리튬폴리머전지라는 신소재를 최대한 빨리 적용하는 과제만이 우리의 관심사였다.
얼마지나지 않아 브이케이가 제작한 리튬폴리머전지는 삼성의 세계 최경량 휴대폰에 장착됐다. 이는 리튬이온전지 시장의 90%이상을 석권하고 있던 일본 업체들보다도 2∼3년 빨리 차세대 2차 전지를 상용화한 쾌거였다.이로 인해 일본업체들은 한국 휴대폰회사들에 대한 공급가격과 조건을 대폭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독점공급이란 조건을 수락한 것이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자칫하면 현재의 브이케이가 존립할 수 없는 위기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구미공장의 실무자들을 중심으로 판단한 나의 결정은 두고두고 올바른 것이었다고 확신한다.
휴대폰 제조회사로 탈바꿈한 지금도 그때처럼 사람을 보고 결정한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중요한 브이케이의 경영철학이 됐다. 바이어를 만나면 항상 회사의 규모나 계약조건보다는 담당자들의 자세와 태도를 먼저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판단은 대체로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브이케이는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우리는 삼성에 상용화된 리튬폴리머전지를 납품했지만 결국 내부의 핵심 기술은 슈빌라사의 것이었다. 우리는 그러한 기술을 국내에 들여오는 독점공급권을 갖고 있는 중간자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2차 전지 셀을 가지고 상용화 된 모델에 장착하는 것에는 나름대로 품질관리나 디자인 등 노하우가 있었다. 그러나 역시 핵심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회사의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만약 독자적으로 리튬폴리머전지 셀을 양산하려는 시도를 한다면 슈빌라사는 우리를 경쟁사로 인식할 것이고 계약서 조항에 따라 에이전트로서의 자격을 박탈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더구나 우리가 자체로 양산 설비를 가동해서 과연 슈빌라사의 전지보다 더 나은 제품을 생산해낼 수 있을 지도 미지수였다. 그러나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우리는 과감하게 자체 기술개발에 돌입했다.
현실에 안주하기 보다는 위기를 감수하더라도 핵심 기술력과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만이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올바른 경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브이케이는 2년 간의 비밀연구끝에 현재의 안성공장에 전지 셀 공정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시도를 과감하게 추진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브이케이는 단순 임가공업체 정도로 머물러 있었을 지도 모른다. 지금도 이러한 브이케이의 원천기술을 지향하는 도전정신은 회사 성장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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