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CEO]김상근 상보 사장

 오뚝이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먼저 가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 보란 듯 성공한다. 그 일이 사양길에 접어들면 또 다른 성장동력을 찾아 모험을 걸고, 넘어졌다 다시 일어난다. 복싱계에 4전5기의 신화를 남긴 홍수환 선수가 있다면 필름업계엔 김상근 상보 사장(58)이 있다. 배고프던 시절, 부모 몰래 시작한 복싱. 아마추어 시합에 나가면 늘 준결승까지 진출했다. 세계 챔피언의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필름업계에선 챔피언이다.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작지만 강한 ‘작은 거인’이 되겠다는 각오가 여전히 대단하다.

◇수입대체로 국가발전기여=김 사장은 1977년 서울 중부시장에서 창업했다. 서울 시내엔 있어야 하겠는데 돈은 없으니 임대료가 싼 데가 그곳이었다. 남이 세를 든 공장 한 켠을 다시 임대해 임가공 사업을 시작했다. 그 때 나이 27세였다. 31년 동안 외길을 걸어온 셈이다.

첫 1년간 수출용 섬유에 들어가는 비닐백 패키지 사업을 했다. 공장도 작은 데다 재하청을 하다보니 부가가치도 없고 고생만 됐다. ‘이대로 가다간 임가공 해주는 업체로 전락하겠다’는 생각에 새 기술을 찾기에 몰입했다. 14살 때 아버지를 여읜 김 사장은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쓰는 것은 더 중요하다”고 입버릇처럼 하시던 선친의 말씀을 사업 아이템 찾는데 접목시켰다. 당시엔 섬유·가발 수출이 붐이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볼 때 돈을 버는 쪽은 수출이고 돈을 쓰는 쪽은 수입이었다. 이제 막 시작한 회사라 감히 수출을 엄두도 못 냈다. 하지만, 수입을 막는 것 만으로도 국가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수입을 대체 할 만한 업종을 찾기 시작했다.

◇수입대체에서 수출로=미국 합작으로 오디오 카세트테이프를 생산하던 새한미디어(옛 미디어)와 인연이 됐다. 당시만 해도 첨단 기술산업이었다. 녹음테이프뿐 아니라 거기에 들어가는 부자재, 부품(미디어테이프 등)을 전량 일본으로부터 수입해 쓰던 시절이었다. ‘이걸 개발해 수입대체를 하면 새한미디어는 물론 우리나라의 경쟁력이 될 것’이란 생각에 사업에 뛰어들었다. 78년이었다. 개발하는 데 1년 정도 걸렸다. 새한미디어가 채택해 줘 미디어 사업을 시작됐다. 이후 선경마그네틱스(현 SKM), SKC가 생겼다. 폴리에스터 필름을 만드는 대기업이 참여하니 산업도 커졌다. 상보는 그 원재료에 마그네틱을 입혀 테이프를 만들었다. 오디오 테이프뿐 아니라 비디오 테이프도 개발했다. 상보가 전성기 때 일본을 제외하고 아시아에서 가장 컸다. 내수야 거의 사라질 지경이지만 해외 시장은 아직 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소니·TDK·후지·히타치막셀 등에 OEM으로 많이 공급한다.

◇내수가격보다는 비싸게 받아야=84년이 되자 수입대체가 어느 정도 됐다. 내수 공급도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85년부터 해외시장을 개척하기 시작해 일본 업체들과 거래를 시작했다.

“수출가격을 정해야하는데 당시만 해도 수출을 내수보다 싸게 공급해야 비즈니스가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국내보다 싸게 공급하면 그쪽에 더 경쟁력이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김 사장은 국내 업체의 경쟁력을 생각해 수출가격을 내수가격보다 30% 더 받기로 했다. 수출부 직원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은 당연했다. 모든 직원들은 “그렇게 하면 장사 못 한다”며 손을 내저었다. 김 사장은 “가격 때문에 못 팔았다고 뭐라 하지 않을테니 일단 값을 30% 올려 오퍼를 내라”고 지시했다. 결국 내수보다 30% 인상한 가격이 받아들여졌다.

그 때만 해도 일본은 최소 30%에서 50% 가량 비싸게 팔고 있었다. 제품이 일본보다 못했을지라도 지나치게 싸게 받을 이유는 없었다고 김 사장은 회상했다.

◇시련을 딛고 성공으로=김 사장은 자본금 40만원으로 회사(상보화학공업사)를 설립했다. 워낙 ‘없이’ 사업을 시작했지만 공장도, 설비도 늘려야 했고 일본 업체와 한번 싸워 이기겠다는 생각에 80년대 말엔 국내 업계로는 처음으로 컴퓨터그래픽을 도입했다. 그때만 해도 사진을 찍어 손으로 접테이프를 붙여가며 도안했는데 선진 업체는 모두 컴퓨터로 해결했다. 직원들을 일본으로 보내서 연수시키고 남동공단에 회사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지금은 오디오·비디오테이프가 사양산업으로 침체했지만 김 사장의 마음 한구석엔 자부심과 긍지가 있다. 오디오·비디오테이프 업계 1위를 한 것. 돈을 많이 못 벌었지만 우리 산업이 세계 1위를 하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했다는 긍지다.

90년대 초 김 사장은 또다른 도전에 나섰다. 코팅이나 인쇄에 사용하는 몰드(인쇄 실린더)를 무거운 철에서 알루미늄으로 바꿔보기로 한 것. 개발비도 많이 들어갔지만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엔지니어를 일본으로 파견해 배워오게 하기도 하고 직접 가서 귀동냥하기도 한 끝에 개발에 성공했다. 시장은 냉혹했다. 초기 비용을 가격에 반영한 상보 제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사업을 포기했다.

90년도 후반 들어 테이프 시장이 CD-R·DVD 등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김 사장은 이것(오디오·비디오테프)만 갖고 가다가는 우리도 문닫을 수밖에 없겠다 싶어 차세대 동력으로 2가지 제품을 개발했다. 하나는 차량이나 건물 유리 외벽에 붙이는 코팅필름(윈도필름)이다. 윈도필름은 지금도 상보의 중요한 사업이다. 또 하나는 ‘디지털프린팅머티리얼’이라고, 프린터용 소모품이다. 당시 시장규모는 1000억원 규모였고 일본 3개 업체가 세계를 장악했다. 네번째 주자인 상보는 양산 설비도 늘렸다.

윈도필름은 성공해 중요한 사업군으로 자리 잡았지만 디지털프린팅머티리얼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일본 원소재 업체의 공급 중단 때문이었다. 상보가 시장에 뛰어들자 선발 일본업체에 비상이 걸렸고 상보에 원소재를 공급하는 회사에 수출중단을 요구했다. 김 사장은 아예 원소재를 국산화하기 시작했다. 1, 2년 걸려 국산화에 성공했지만 작은 흠이 있었다. 전문가를 찾았다. 김 사장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전문가의 한마디에 그 자리에서 사업을 접었다. 거의 완성단계였지만 더 하다간 부도를 맞게 생겼기 때문이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개발 투자액 70억원이 너무 아까웠다. 몇 년을 헛되이 보내다가 새 빛을 찾았다. 디스플레이 분야였다. 말 그대로 ‘전화위복’이었다.

“LCD 시장이 막 뜨기 시작했고 우리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LCD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죠. 정말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었습니다.” 백라이트유닛(BLU) 필름을 개발한 데 걸린 시간은 2년이었고 LG디스플레이(당시 LG필립스LCD)로부터 승인 받는데 1년이 걸렸다. BLU 필름은 지금 상보 전체 매출의 47%(2007년 기준)에 이른다. 올해 50%를 넘을 전망이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신용’= 김 사장이 31년 동안 사업을 해오면서 지켜온 신용이 없었다면 지금의 상보는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급료를 한 번도 늦춰본 적이 없다. 월급날이 일요일이면 전날에 지급했다. 은행거래를 할 때도 이자나 약속한 적금을 하루도 늦춰본 적이 없다. 그 효과는 어려울 때 나왔다. 기업이 어려워지면 가장 먼저 자금을 회수하려는 데가 은행인데 김 사장에겐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신용은 은행이 저를 믿어주고 대출을 더 해주고 사실상 다시 사업을 영위해 나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됐습니다.”

◇천상 사업가= 김 사장은 최근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다’고 자문해본 적이 있다. 별달리 호사를 누린 적도 없다. 돈도 많이 못 벌면서 허리띠 풀어놓고 마음 편하게 술 한잔 한 적도 없었다. 5∼6년 전부터 골프를 시작해 주말에 고객들과 운동하거나, 1년에 한두번, 아내와 함께 오페라 관람하는 게 호사라면 호사다. 내일모레면 회갑이고 한 인생을 마무리하는 단계도 다가오는데 과연 나를 위해 뭘 했는지 생각해보면 이따금 서글픈 생각도 든다는 김상근 사장. 이제 스스로에게 관대하고 자신만을 위해 투자를 해보자 마음을 먹지만, 아침에 눈 뜨고 나오면 일외엔 싹 잊어버리는 그는 천상 사업가다.

주문정기자 mjjoo@

◆김상근 사장은=195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복싱과 검도가 수준급이다. 대동상고를 졸업하고 군 제대 후 신영진화학에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국제대학에 다니다가 상보의 전신인 상보화학공업사를 설립했다. 31년 동안 경영을 하면서 여러 번 새 사업에 도전해서 실패와 성공을 모두 맛 봤다. 세계 오디오·비디오 테이프 시장을 석권했으며 윈도필름·BLU필름 분야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다. 호는 효송(曉松)이다. 몇 년전 지인이 새벽에 우뚝 솟은 소나무처럼 청렴한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에서 지어줬다. 김포상공회의소 부회장과 산업은행 KBC(Korea Bank Ceo)클럽 회장을 맡아 사회봉사활동을 활발하게 한다. 검도협회 부총재를 지냈고 김포 무역상사 협의회 회장과 인천검찰청 부천 지청 범죄예방위원회 운영부회장으로 활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