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기야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태산엘시디가 기업회생 절차에 들어갔다. 상반기에만 매출 3441억원, 영업이익 114억원을 기록한 탄탄한 IT기업이 KIKO라는 환 헤지용 금융파생상품 손실에 손을 들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중소기업이 KIKO로 인해 쓰러질지 모른다. 환율 1150원을 상정할 때 우리 기업들의 KIKO 손실액은 1조7000억원에 육박한다는 통계도 있다.
실물에 종속적이던 금융이 2000년 이후에는 모든 경제를 장악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의 금융기술자들 손에서 전 세계가 놀아난다. 실물 성장이 뒷받침되지 못한 부동산과 머니게임에 의한 세계 경제의 버블이 시작됐다. ‘유동성’은 만병통치약이었다. 월가의 젊은이들은 ‘기술 혁신’이라며 자신들조차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파생상품을 선보였지만 폭탄 돌리기였다. 마침 IMF의 질곡에서 빠져 나오던 금융후진국 한국은 이들의 먹잇감이자 테스트베드였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2000년 부터 2007년까지 한국이 수출로 벌어들인 수입은 누계치로 1500억달러가량이다. 같은 기간 외국인들은 각종 금융상품을 앞세워 한국 주식시장에서 63조원어치를 사들였고 평가치는 237조원에 이른다. 해마다 배당금으로 걷어간 돈은 24조원이 넘는다. 결국 200조원 정도를 챙기는 셈이다. 환율을 1000원으로 계산하면 2000억달러다. 한국의 기업과 근로자들이 8년간 노사분규를 겪어 가며 뼈 빠지게 일해서 창출한 국부를 그들은 컴퓨터 키보드 몇 번 두드리는 것으로 자기 뱃속에 넣을 수 있다. 더욱이 한국은 환율마저 우호적이다. 그러니 외국인들은 지금도 한국 주식을 열심히 내다 판다. 덕분에 죽어나는 것은 대한민국의 개미들뿐이다.
그렇다면 태산엘시디와 같은 죄 없는 중견기업을 도산으로 몰고가는 우리 금융권의 수준은 어떤가. 월가의 모든 것을 ‘절대 선’이라 외치며 추앙했다. 하지만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다. 여전히 담보를 받고 대출하는 것이 금융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교육받고 최신 금융공학을 접해본 소수의 ‘검은머리 외국인’들은 한국 시장에서 숭상의 대상이었다. 오죽하면 대통령이 민간인 시절 20대 금융업자에게 사기까지 당했을까. 압권은 산업은행장이다. 전임 리먼브러더스 한국 책임자였던 그는 새 정부에 의해 발탁됐다. 그가 리먼 사태가 터진 이후에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산은이 인수했다면 (리먼이) 이렇게 몰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신을 밝혔다. ‘월가 따라하기’가 금융의 선진화라며, 글로벌 금융회사는 물론이고 미국 정부조차 포기한 리먼을 겁도 없이 인수하려던 우리 국책은행과 기관투자가들의 지난해 기준 해외 투자성적표는 다음과 같다. 손실 12조원. 최근의 금융위기를 감안해 재평가한다면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12조원만 따져도 삼성전자의 한 해 최대 이익보다 훨씬 많다. 앞으로 벌고, 뒤로 까먹는 나라 살림이다.
리먼 사태는 불투명한 회계, 신뢰 상실이라는 문제점은 미국이 더 심하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미국은 금융권의 부실 규모조차 가늠하지 못한다. 그런 미국에 터질 대로 터진 한국 금융기관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중소기업 조르기밖에 없다. 가뜩이나 경색된 자금시장에서 KIKO로 죽이고, 대출 규제와 횟수로 또 한번 울린다. 리먼을 인수할 여력 있으면 죽어가는 우리 중소기업을 돌아보라. “한국에서 중소기업 하는 것은 ‘천형(天刑)’”이라는 어느 기업인의 한탄이 이제는 ‘절규’로 들린다.
이 택 논설실장 etyt@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