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산업 50년, 새로운 50년] 디지털 기회 1위의 나라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각 나라별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가입자 분포 및 가입자 수

 대한민국은 2000년을 전후해서 스스로 IT강국이라고 자부하기 시작했다. 외국 어디를 나가봐도 한국만큼 IT인프라가 잘 갖춰진 나라가 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도시는 물론이고 농촌과 산골, 도서지역 등 전국 어디에나 초고속 인터넷망이 깔렸다. 세계에서 가장 앞선 인터넷 환경은 IMF 관리에 들어간 한국을 불과 2∼3년 만에 디지털 기회 1위 국가로 우뚝 세웠다.

 1997년 일어난 IMF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에 예상치 못한 격변을 가져왔다. 기업 도산과 거센 구조조정 속에 수많은 실직자가 거리로 쫓겨 나왔다. 분노한 국민은 연말 대선에서 진보성향의 김대중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서 침체한 내수경기 활성화, 수출 확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묘안이 필요했다. 국민의 정부가 주목한 분야는 IT산업이었다.

 마침 미국에서 IT붐이 일어나 세계는 인터넷 열풍, e비즈니스 바람이 절정에 달하는 시기였다. 한국정부는 IT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거시적 차원에서 가능한 모든 노력을 했다. 국내에는 고학력의 우수한 IT 인재들이 널려 있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느려 터진 데이터 통신망을 빛의 속도로 업그레이드하는 문제였다.아날로그 모뎀 접속으로 인터넷 혁명에 뛰어들 수는 없었다. 초고속 인터넷망 보급이 대한민국의 최우선 국가사업으로 부상했다.

 국민은 미래의 일류국가 진입 여부가 인터넷과 정보화에 달렸다는 정부의 메시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집집마다 PC를 구입하고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신청했다. 인터넷 접속은 누구라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가능한 기본권리로 간주됐다. 생사의 기로에서 디지털 혁명에 뛰어든 한국사회의 변화는 놀라웠다.

 ◇초고속 인터넷 1위 국가=인터넷의 활용이 세계로 확산되던 90년대 중반만 해도 한국의 인터넷·PC 보급률은 그다지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1997년의 IMF 위기로 대량의 실업자를 짊어진 한국정부는 IT산업을 경제회생의 기폭제로 간주하고 초고속 통신망 보급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정부의 확고한 지원 의지와 함께 대형 통신사들이 과감한 투자에 나섰다. 두루넷은 1998년 6월 케이블모뎀 방식의 국내 최초의 초고속 인터넷서비스에 나섰고 하나로통신이 케이블모뎀과 세계 최초의 ADSL방식 서비스를 잇따라 선보이며 초고속인터넷 시장에 합류했다. 1999년 6월에는 KT가 ISDN을 버리고 ADSL시장에 가세하면서 초고속 인터넷 붐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한 지 불과 4년만에 한국의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 수는 1000만명을 넘어섰다. 국민 네 명 가운데 한 명이 가입한 것이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2000년 한국은 인구 100명당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 수가 8.4명으로 세계 1위라고 발표했고 이러한 순위는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인터넷 이용자도 2000년대 중반까지 세계 5위권에 들어갔다. 인터넷 접속 속도 면에서 단연 1위를 달렸다. 한국의 정보화 기반 및 이용환경은 1996년 본격화된 CDMA 이동통신에 초고속 인터넷망이 더해지면서 2000년을 전후해서 세계 정상에 이르렀다. 세계 언론들은 우리나라 IT인프라의 빠른 구축과 활용성과에 부러운 시선을 보냈다.

 ◇IT 계몽운동=하드웨어(HW)가 완성되면 소프트웨어(SW)도 갖춰야 한다. 인터넷 인프라의 급속한 발달과 동시에 국민의 정보문맹을 퇴치하기 위한 IT 계몽운동도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정보 소외계층을 없애고 지역 간 정보격차 벽을 허물기 위한 PC 교육이 정부의 전폭적 지원 아래 불길처럼 번져갔다. 매년 주부 200만명과 군 장병 20여만명을 대상으로 정보화 교육이 진행됐다. 컴퓨터를 켜는 것도 두려워하던 주부들이 웹서핑을 하면서 쇼핑몰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노년층의 정보화 교육을 지원하는 실버넷운동도 진행됐다. 키보드를 치지 못함은 시대에 뒤떨어진 표상으로 간주됐다. 이 같은 IT 계몽운동은 한국민의 높은 교육열과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 덕분에 가능했다. 덕분에 한국은 인구의 70%가 인터넷을 이용하는 네티즌이 됐다.

 정부는 IT교육 외에 PC 보급률을 높이기 위한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 정통부는 저렴한 가격, 장기할부의 인터넷 PC 보급사업을 1999년 10월 시작했다. 인터넷 사업은 PC 내수시장에 적잖은 타격을 줬지만 당초 의도했던 대로 중산 소외계층의 정보마인드 제고에 기여했다. 인터넷 서비스업체도 장기가입을 조건으로 공짜 PC를 제공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한국은 남녀노소, 지역과 계층을 불문하고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서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의 나라가 됐다.

 ◇한국형 IT 사업모델의 등장=세계 정상의 초고속 인터넷망은 코리안 IT 드림을 가능하게 했다. 우후죽순 생겨난 벤처기업은 막힘이 없는 최고의 통신망 위에서 꿈꾸던 인터넷 사업모델을 앞서서 펼칠 수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 조악한 통신망과 낮은 PC보급률로 불가능한 인터넷 사업모델도 한국에서는 그 모든 것이 가능했다.

 PC방은 한국인이 만들어낸 독자적 IT 문화로 세계에 퍼져 나갔다. 실직자들은 너도나도 새로운 직업으로 골목마다 PC방을 열었다. 한때는 2만여개의 PC방이 전국에 산재하게 됐다. PC방은 초고속 인터넷 접속거점이 됐고 온라인 게임이라는 독특한 사업모델이 한국에서 꽃피도록 했다. 외국은 콘솔형 게임이 인기를 끌었지만 상시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한국인은 온라인상에서 수십만명이 펼치는 판타지 게임 세상에 열광했다.

 e비즈니스 붐을 타고 유능한 젊은이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면서 벤처사업에 뛰어들었다. 테헤란 밸리는 IT 신사업의 시험장으로 떠올랐다. 한국인의 성급한 기질이 인터넷 시대를 맞아서 세계 시장을 주도하는 장점이 됐던 것이다. 새롬기술과 하나로통신이 공동으로 선보인 무료 인터넷 전화서비스 VoIP(일명 ‘다이얼패드’ 서비스)는 국내 통신서비스 시장을 강타하면서 한때 KT의 주식가격을 능가하는 이변을 낳기도 했다. 컴퓨터와 통신, 반도체는 물론이고 가전 분야까지 인터넷과 연관돼 변화를 겪었다.

 2000년 1월 1일에 컴퓨터망에 문제가 생긴다는 Y2K는 한국 IT업체에 또 다른 황금수요를 제공했다. IT산업은 IMF를 극복하는 우리 경제성장의 견인차로서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2000년대 초반 IT산업의 성장률은 연 15%로 나머지 산업군의 두 배에 달했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