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포럼]대한민국의 R&D조급증](https://img.etnews.com/photonews/1001/201001270094_27013513_1184834774_l.jpg)
지난해 8월 영국에서 열렸던 IWDW(International Workshop on Digital Watermarking)에 다녀왔다. 이 국제 워크숍은 워터마크 기술을 연구하는 학자와 연구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새로 개발한 기술을 발표하는 자리다. 이 워크숍은 한국에서 시작됐고 지금도 조직과 진행을 한국이 주도하고 있다. 문제는 한국에서 시작된 이 워크숍이 중국의 연구 논문으로 도배하다시피 진행되고 있으며 한국은 완전히 소수자그룹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26편의 논문 중에서 중국교수들이나 연구원들이 발표한 논문은 16편으로 다수를 점하고 있고 한국대학에서 발표한 논문은 단 1편 뿐이었다. 발표자 명단 74명 중에서 한국 사람은 단지 두 명 뿐이라는 점도 충격적이다.
워터마크 기술은 미래의 저작권 보호기술로 인식되고 있다. 중국정부가 이를 ‘미래기술’로 인식하고 연구개발을 늘리고 있고, 엄청난 연구인력들이 달려들고 있다. 더구나 이 기술은 중요한 메시지를 음악이나 영화 속에 숨겨서 보낼 수 있기 때문에 군사적인 용도로도 아주 중요하고, 북한에서 나온 수퍼 노트와 같은 정교한 위조 지폐를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주도적으로 시작된 이 분야에 왜 한국교수들의 참여는 줄어들다 못해 전멸해가고 있는가. 한국정부의 R&D조급증과 연구과제 심사에 엄격하게 적용되는 ‘중복과제 방지’ 명분 때문이다. 최근 연구제안서를 제출하면 ‘워터마크 기술은 이미 다 개발됐다’는 논리와 ‘국민의 혈세를 가지고 같은 이름의 연구에 중복 투자할 수 없다’는 정부의 방침 때문에 대부분의 워터마크 연구 제안서가 심사에서 기각됐다. 연구원들이 중복과제라는 것을 피하기 위해 워터마크라는 이름대신 ‘데이터 은닉기술’ ‘포렌직 마크기술’ 등으로 위장하기도 했다.
워터마크 분야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기술적 난제도 많고, 새로운 세부분야도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지금도 워크숍과 학술대회를 통해 수많은 논문이 발표되고 토론이 벌어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 전자 업계에서 개발하고 있는 3DTV는 새로운 워터마크 연구분야다. 워터마크에 은닉되어 송수신되고 있는 메시지 은닉 기술이나 화폐삽입기술도 계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단지 워터마크라는 이름 하나로 묶어 중복과제 방지의 이유로 지속적인 연구를 중단시킨다면 R&D를 통한 우리 나라의 미래는 없다고 본다. 문제는 훌륭한 프로젝트를 발굴해내고, 어떻게 좋은 성과를 내느냐에 달려 있다. 한국처럼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중복과제인지 먼저 심의하고, 수행 후에는 예산 집행이 적정했는지 여부로 프로젝트 성공을 따지는 풍조로는 좋은 프로젝트 수행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은 더 이상 다른 집단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하는 불신사회가 아니다. 연구 제목을 가지고 중복과제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단세포적인 사회는 더욱 아니다. 연구를 집행하는 부처의 관리들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과제의 미래 가치와 성공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같은 방식을 고집하는 한 미래의 대한민국 R&D는 쓸 데없는 중복과제 판단에 매달려 정말로 필요한 연구개발을 놓치고, 엉뚱한 혈세의 낭비로 흐를 수 있다. 미국 유니버셜뮤직에 납품할 정도로 국내의 기술이 인정받고 있지만 이런 추세가 지속되면 저작권 보호를 위해 중국 기술과 제품을 사다 써야 할는지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된다.
최종욱 상명대 소프트웨어대학 교수 juchoi@markan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