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훈의 디지털 확대경]동반성장 우수기업의 두 얼굴

1962년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처음 10년간 먹고사는 기본 생존문제 해결에 치중했다. 효과가 있었다. 이후 제3차 경제개발부터 강조된 것이 `고도성장`이다. 계획은 5차까지 이어지며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엄청난 경제기적을 일궈냈다. 여기서 `한강의 기적`이란 말이 나왔다.

그 기적은 초고속 성장, 압축 성장으로 달리 표현된다.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 근면한 국민성, 정부의 적극적인 수출증대 지원이 기적 같은 성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빛이 있는 곳에는 그림자도 있다.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의 이면에는 턱없이 낮은 임금이, 근면한 국민성 이면에는 장시간 노동이, 정부의 수출증대 지원 이면에는 대기업 위주의 파격적 지원이 있었다. 그림자다.

오늘날 우리나라 30대 대기업은 국내총생산(GDP)의 95%를 담당한다. 그들이 휘청이면 국가 경제 전체가 흔들린다. 경제학자들은 지금의 심각한 불균형과 쏠림현상이 20세기 중후반 경제개발계획의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과거 경제기적의 후유증을 치료할 방법으로 정부가 제시한 것이 동반성장이다.

대기업이 공들여 쌓은 부를 무조건 중소기업에 나눠주라는 것은 분명 사회주의적인 발상이다. 바람직하지도 않다. 단순한 부의 재분배로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공존할 수 있는 건전한 생태계 조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드시 실천해야 할 목표다. 이는 경제민주주의, 사회정의, 공생발전 등의 용어로 달리 표현된다.

한 달 전 56개 대기업 대상 동반성장지수가 공개됐다. 2010년 9월 대통령이 동반성장을 집권 하반기 주요의제로 선정했고, 올해 들어 성과공유 확인제 시행과 더불어 행동 정책으로 구상됐다. 동반성장지수를 접한 대기업이나 협력업체 모두 불만을 쏟아냈다. 대기업은 불경기 업종인 유통, 건설, 제조업체만 낙제기업으로 분류돼 억울하다고 항변한다. 협력업체에 속하는 중소기업의 불만은 보다 구체적이다. “10억원짜리 시스템을 납품하는 과정에서 뒷돈으로 2억원을 요구하는 회사가 이번 평가에서 합격점을 받았다.” “이 회사는 프로젝트 킥오프 행사 이후 1000만원이 넘는 뒤풀이 비용을 납품업체에 떠넘긴다.” “대금결제 시점을 대기업 창고에 자재를 입고한 후가 아닌 입고된 자재가 사용된 시점으로 따지는 건 부당하다.”

협력업체에서는 대기업의 납품단가 조정이나 납품 관련 부대비용 지출, 킥백(kickback)으로 불리는 부당한 뒷돈 요구 등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사상 처음 도입된 동반성장지수라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부의 시도에는 박수를 보낸다. 동반성장지수를 산정하고 평가하는 공정거래위원회가 다음 평가부터 납품단가 조정 배점을 기존 2.35점(100점 만점 기준)에서 10점으로 높인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는 20여년 전 한 토론회에서 부정부패가 근절되지 않는 것을 목표가 너무 높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근절`이 당장의 목표가 아니라 첫해는 시든 이파리를 몇 개 뜯고 다음 해에는 썩은 가지를 좀 잘라내는 식으로 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단계적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물론 이해를 돕기 위한 비유가 가미됐다. 타성을 깨는 혁신에는 불편함과 고통이 따른다. 선진기업, 선진국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할 성장통이다. 대기업도 다양한 방법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경영인의 개선 노력을 헛되게 만드는 건 내부 부조리다. 기업 밑단에서 벌어지는 악습을 깨지 않으면 동반성장은 공염불이다. 경영인의 확고한 개혁의지와 이를 구체화할 수 있는 세밀함과 긴 호흡이 그래서 필요하다.

최정훈 성장산업총괄 부국장 jhcho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