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와 중국이 올해로 수교 20년을 맞았다면, 대만과는 단교한 지 스무해가 됐다. 갑작스런 단교에 양국 관계는 급랭했고, 최근 10여년은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주력 산업 분야 기업들이 사활을 건 경쟁을 펼치면서 적대적 감정마저 확산됐다.
그런데 최근 두 나라 사이에 새로운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소모적인 경쟁이 아니라 보완적이고 협력적 관계를 만들어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해보자는 밑그림이다. 주인공은 바로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전자·IT산업계 기업들이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퇴, 스마트 빅뱅이 가져온 산업 패러다임 변화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추격과 견제에 바빴던 양국이 이 같은 핑크빛 협력을 이뤄낼 수 있을까. 가능성을 점검하기 위해 양국 산업계 종사자와 전문가가 머리를 맞댔다. 주제는 `한국-대만 IT협력 방안`. 좌담회는 전자신문과 KOTRA 타이베이무역관이 공동 주관해 지난 15일 타이베이 하워드프라자호텔에서 열렸다. 참석자들의 높은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에 토론은 이후 식사자리까지 이어져 다섯시간 동안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
(가나다·韓臺순)
(한국측)
곽응길 어라이즈그룹 부사장
박성곤 코아시아 부사장
양장석 KOTRA 타이베이무역관장
(대만측)
왕싱런 아덴텍 처장
린잉이 광전과기공업협진회(PIDA) 조장
천즈양 산업정보연구소(III) 총감
정셰관 사이언테크 부사장
(사회) 정지연 전자신문 국제부장
◇사회=한국과 대만은 2011년 기준 연간 교역규모가 329억달러로 상호 교역순위 4~6위에 달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에 있다. 반면에 상대국에 대한 투자는 지난 50년간 누계액이 각각 6억달러에 못미친다. 그 이유는 양국간 주력산업이 중복되고 상호 경쟁적인 산업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같은 상황에서 두 나라가 IT 분야에서 협력해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우선 양국 산업계가 직면한 문제점을 한번 짚어보자.
◇천즈양(III 총감)=유럽과 미국의 반덤핑 제재가 날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대만 등 수출 위주 국가들은 앞으로 여러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악화된 환경에도 IT 분야 성장가능성은 여전히 높다. 글로벌 IT시장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커질 것이다. 중국이 12차 5개년 계획에서 대대적인 투자를 통해 IT를 확산시키기로 한 것도 좋은 기회다. 일본은 중국과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이다오) 문제로 분쟁 중이다. 한국이 중국과 FTA를 체결한다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뿐 아니라, 삼성과 LG 같은 브랜드력 있는 대기업을 내세워 빠르게 시장을 잠식할 것으로 본다.
반면에 우리는 내로라할만한 브랜드도 없고, 어떻게하면 한국처럼 될까 늘 고민이다.
◇박성곤(코아시아 부사장)=한국은 대만과 유사한 점이 많다. 내수시장이 작고 수출의존형이다. 천연자원도 풍부하지 않고 인적자원이 전부다.
중국의 부상이 두려운 건 한국도 마찬가지다. 근시일내 중국과 전면전을 벌여야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다. 그동안 중국 비즈니스에 수업료도 많이 냈다. 실패 사례도 많다. 그럼에도 여전히 중국을 잘 모른다.
그에 비해 대만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언어·문화·인맥 등 여러 장점을 갖고 있다. 글로벌 IT기업의 생산기지 역할을 하면서 개발능력도 갖췄고, 한국보다 원가경쟁력도 높다. 협력의 핵심이 여기서 출발한다고 본다.
◇사회=양국 산업계의 공통된 과제이자 관심사가 중국이라는 걸 확인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에서 어떻게 협력해야 시너지를 낼 수 있을까. 우선 그간 서로 협력해 본 경험을 나눠보자.
◇린잉이(PIDA 조장)=얼마전 우리 협회가 한국을 방문해 디스플레이 관련 단체들과 제휴 협약을 맺었다. 양국 기업들이 필요로하는 기술 및 시장 정보도 교환하고 회원사간 교류도 확대하고자하는 취지다.
그동안 양국은 디스플레이시장에서 경쟁도 했지만 상호 협력도 많이 했다. TV 완제품 생산을 위해 서로 부족한 패널은 보완해주고 냉음극형광램프(CCFL)·발광다이오드(LED) 백라이트 유닛(BLU) 등도 상당수 공급했다.
최근들어 한국 대기업 사이에서 부품까지 수직통합하는 움직임이 강해지면서 대만 협력사들의 수출 물량이 줄고 있다. 대만 기업은 수평협력 위주로 해왔던 터라 한국 산업계와의 구조적, 문화적 차이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정셰관(사이언테크 부사장)=대만에는 세계 최대의 반도체 파운드리업체 TSMC도 있고, 디스플레이업체 AU옵트로닉스(AUO)와 치메이(CMO)도 있다. 이들이 한국산 장비를 구매하려해도 팔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후 기술지원도 잘 안된다. 삼성·LG와 협력관계에 있는 회사들은 아예 거래조차 안하려든다. 물론 한국 대기업들이 초기단계부터 장비업체에 투자를 해 공동 기술 개발로 독점적 관계를 확보한다는 것은 안다. 이런 상황에서 해외 업체는 끼여들 여지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왕싱런(아덴텍 처장)=한국에 투자했던 결정(이 회사는 2010년 11월 4000만달러를 들여 평택에 반도체 테스팅 센터를 설립했다)은 효율적이었다. 한국시장 수요에 현지 테스트를 원하는 고객 요구 때문에 시작했는데, 한국 정부의 지원도 있고 현지 반응도 좋아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새로운 고객을 추가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한국산 장비와 제조업체에 대한 견해는 앞선 의견과 비슷하다.
◇사회=반도체·디스플레이 등 한국과 직접 경쟁하는 부분에서 겪은 경험들이라 아주 예민한 것 같다. 중국 시장을 겨냥해 꼭 필요하면서도 시급히 협력할 다른 분야는 없을까.
◇곽응길(어라이즈그룹 부사장)=공동 연구개발(R&D)과 특허출원 등 무형의 자산을 창출하는 데에서 양국 기업이 협력할 무궁무진한 기회가 있다고 본다. 대규모 설비 투자를 하는 것만이 협력이 아니다. 초기부터 머리를 모아 시장을 면밀히 관찰해 아이디어를 내고 각자 장점인 기술력을 합쳐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음, 특허를 출원하고 공유하는 체제다. 핀란드 국립기술연구소(VTT)가 각국에 진출해 현지 기업 및 연구기관과 펼친 공동 R&D가 대표적인 예다.
대만은 중소기업들이 대다수라서인지 몰라도 지식재산(IP) 창출과 보호에 대한 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기업이 상당수다. 또 국제특허협력조약(PCT)에도 빠져 있어 기업들의 인식도도 낮다. 중국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IP에 대한 대응력과 보호시스템이 필요하다. 이 점은 한국 중소기업도 마찬가지다.
연구거점을 한국에 둘 필요도 없다. 대만에 두고 양국을 오가며 공동 연구를 할 수도 있다.
◇박성곤=대만은 중국 진출 교두보일뿐 아니라 세계 IT시장의 흐름을 감지하기에 아주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글로벌 IT기업 제조 심장부이기 때문에 부품 수급 현황 등으로 시장을 한발 앞서 판단할 수 있다. 한국 기업이 대만에 관심을 갖는 이유다.
이 같은 여건을 바탕으로 대만 기업의 칩셋 등 솔루션 디자인 역량과 한국 기업의 첨단 모바일 경험을 결합한다면 호흡이 빠른 스마트폰 시장에도 뭔가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은 아직까지 스마트폰 제조에 있어서 핵심적인 기술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더 늦기 전에 양국이 보조를 맞춰야한다.
◇천즈양=양국 산업계가 전면적인 경쟁을 펼치는 산업군과 한국 대기업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형식의 협력은 어렵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것 같다. 대만 기업 특유의 장점인 수평적 협력 경험을 살릴 수 있으려면 한국 중소기업과의 제휴 모색이 더 효과적일 수 있어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나 지원기관의 역할이 중요하다. 양안간 체결한 경제협력기본협정(ECFA)도 정부가 교량을 세웠기 때문에 이후 기업이 움직일 수 있었던 것처럼 한국과 대만 간의 협력도 교량이 필요하다. 중간자적 입장에서 도와줄 지원체계가 있어야한다.
그동안 서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도 오늘 같은 만남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과 미국, 일본과의 협력도 수년 걸렸다. 한국과는 오늘 첫 단추를 잘 꿴 것 같다.
◇양장석(KOTRA 타이베이무역관장)=양국 IT기업간 가교 역할을 더 잘하라는 채찍으로 알겠다. 기업간 적극적인 소통을 지원해 양국이 좋은 협력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 저희의 소임이다. 대만과의 협력이 `중국을 향한 관문(The Gateway to China)`이라는 명제도 검증해보이도록 힘을 모으겠다.
◇사회=성공 사례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 오늘 좌담회가 양국 IT협력에 밑거름이 되길 기대한다. 좋은 의견 감사하다.
정리=
정지연기자 jyju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