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미지의 세계로 도전하려는 학생에게
KAIST 물리학과에서는 학부에서 대학원으로 진학한 석사 1학년 때는 실험실을 결정하지 않고 다같이 수업을 듣다가 석사 2학년 때 전공 실험실을 결정하도록 합니다. 1학년 때는 물리학과의 다양한 실험실을 개인 선택에 따라서 1~2주씩 돌아가면서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때 어떤 실험실이 적성에 맞을지 전혀 알 수 없어서 가능한 한 다양하게 많은 실험실을 부지런히 다녔습니다.
![[여성과학기술인 열전! 멘토링 레터]과학기술위성과 냉장고에 코끼리를 넣는 방법의 상관관계](https://img.etnews.com/cms/uploadfiles/afieldfile/2013/12/13/510021_20131213143714_060_0001.jpg)
플라즈마 핵융합 실험실, 고체물리 반도체 실험실, 비선형 이론물리 실험실, 광학 레이저 실험실 등 카이스트 물리학과에 있는 수십개의 실험실을 분야별로 고루 들어가서 직접 보고 체험해 본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물리를 하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공부도 한 셈이고, 구체적으로 어떤 전공이 나한테 가장 적합할지 열심히 생각하던 어느 날 우연히 우주과학 실험실을 가보게 된 것입니다.
KAIST 물리학과 우주과학 실험실에서 “그래, 바로 이거야(유레카)!”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인공위성을 손으로 직접 만지고 원하는 디자인으로 만들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밤하늘에 자기 이름이 써있는 자기 별을 갖고 싶다는 꿈을 꿀 수가 있을까요. 우주과학 실험실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우리 기술로 만들어 올린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를 만든 존경하는 선배와 스승이 있었습니다. KAIST 인공위성 연구센터에 처음 들어갔던 2000년에도 그랬지만 13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우리나라에서 자기 손으로 직접 인공위성을 만들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성으로서 유일하게 인공위성연구센터에서 위성을 직접 만드는 여학생이었습니다. 처음 우주과학실험을 들어가겠다고 지도교수님을 찾아갔던 날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네요. 인공위성을 만들어 볼 수 있다는 매력으로 우주과학실험실은 경쟁률이 매우 치열했기 때문입니다. 힘도 없어 보이는 자그마한 체구의 여학생이 하드웨어를 직접 만들겠다고 당차게 말을 하니까, 교수님도 유심히 보셨겠죠.
과연 힘든 전자회로 일, 기계구조 만드는 일 등등을 날밤 새가면서 책임지고 할 재목인가 아닌가 하시면서 말이죠. 함께 경쟁을 했던 힘 좋아 보이는 물리학과 석사 남자 동기 여럿 제치고 무사히 우주과학 실험실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건 교수님과 선배들이 나의 `공격성과 적극성`을 긍정적으로 보셨기 때문이라고 전해들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기대하는 수동적이고 부드러운 모습에 전혀 상반되는 모습을 인터뷰할 때 보여드렸던 게 통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에서 3년6개월을 과학기술위성1호 우주물리 탑재체를 만드는데 보냈습니다. 내가 만든 인공위성이 러시아 발사기지에서 우주로 무사히 쏘아 올려진 2003년 9월부터 다시 물리학과 연구실 내 자리로 돌아와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게 됐습니다. 실제로 인공위성 탑재체와 씨름한 3년6개월 동안은 제대로 된 연구를 거의 하지 못했었죠.
당장 눈앞에 닥친 하드웨어 숙제를 납기 내에 끝내고 위성 본체시스템 스케줄에 맞춰야 했기 때문에 거의 미친 듯이 일만 했습니다. 결국 박사논문은 1년6개월도 안 되는 남은 기한에 새로운 연구 주제를 찾아서 논문을 썼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하라면 못해낼 것 같은, 잘 몰라서 용감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대학원생 관련된 유머로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이라는 게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아는 사람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공계 대학원생한테 시킨다`는 겁니다. 말 그대로 이공계 대학원생은 무슨 일을 시켜도 다해내야만 한다는 뜻이죠. 어느 대학원을 가도 그렇게 다들 힘들겠지만, 나의 석·박사 시절은 과학기술위성 1호와 함께 숨가쁘게 흘러갔습니다. 그 시간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가장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도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내 소개를 할 때 절대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KAIST 인공위성 연구센터에서 우리별 시리즈 위성의 네 번째 위성인 과학기술위성 1호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인공위성연구센터에서 일하던 시절에 SBS에서 드라마 `KAIST`가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그 드라마 주요 배경이 인공위성연구센터였고, 주요 에피소드 중 하나도 인공위성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드라마의 주인공중 한 명인 배우 강성연이 맡았던 괴짜 물리학도 여학생이 바로 나를 롤 모델로 만든 역할이었다는 것을, 드라마가 끝나고 한참 뒤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드라마 대본작업에 참여했던 우리 실험실 선배로부터 듣게 됐죠. 그런 인연으로 언론 인터뷰도 몇 번 하게 되고 말이죠.
내가 만든 나만의 소중한 별인 과학기술위성 1호에는 내 이름이 금박으로 잘 쓰여있고, 지금도 저 밤하늘 어딘가에서 나를 내려다 보면서 지구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자랑스럽고 뿌듯한지 모릅니다. 내 손때가 묻은 위성이 저기 서쪽 하늘에서 반짝이는 저건가. 이런 생각! 힘들긴 했지만, 대학원생 시절은 정말 소중하고 꼭 필요한, 나를 한 단계 성장시킨 값비싼 시간들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힘든 대학원생활을 해보면 알겠지만, 지나고 나면 더없이 귀중한 시간들이었다는 걸 깨닫게 될 것입니다.
From. 황정아 한국천문연구원 창의선도과학본부 선임연구원
제공:WISET 한국과학기술인지원센터 여성과학기술인 생애주기별 지원 전문기관
(www.wiset.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