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뒷전에 밀린 반도체 산업 육성

글자 작게 글자 크게 인쇄하기
[기자수첩] 뒷전에 밀린 반도체 산업 육성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 정부 지원이 더 이상 필요없다는 시각은 정말 위험합니다. 지원 사업을 안 한다는 의미는 결국 인재와 기업을 키우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정보통신진흥기금 문제가 결국 터졌다. 미래부가 관리하는 기금을 산업부가 타다 써야 하는 구조가 문제였다. 원인은 정보통신부가 해체될 때 산업부(지경부)로 이관된 반도체 업무가 미래부로 다시 이관되지 않고 산업부에 남으면서 벌어졌다. 반도체 업무는 산업부에 남고, 기금관리는 미래부로 이관된 어정쩡한 정부부처개편이 화근이 됐다. ‘정보통신진흥’기금에서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연구개발비가 나간다는 것도 모양이 좋지 않고, 예산조차 만들지 못한 산업부나, 남은 예산을 매몰차게 자르는 미래부도 자랑할 거 하나 없다.

연초부터 업계에서는 ‘반도체 신규 정부과제가 없어진다’는 소문이 돌았다. 기존 과제들이 순차적으로 종료하면 약 5년 뒤에는 관련 정부 지원 사업이 모두 없어지는 게 큰 그림이라는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반도체 사업을 너무 잘해서 더 이상 정부 자금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원인이었다. 중소기업 지원하기도 빠듯한데 대기업에 왜 정부 돈을 줘야 하냐는 시각도 한몫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외에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선두에 속한 기업이 대한민국에 있던가. 두 기업은 선진기업이지만 나머지 기업은 여전히 후발기업이다. 인텔, 마이크론 등 세계적 반도체 기업에 장비를 공급하는 한국 기업조차 찾기 어렵다.

국내 반도체 장비 기업 현실은 초라하다. 수조원대 매출을 올리는 어플라이드나 램리서치와 비교하면 1조원 매출 기업은 없다. 갈 길이 멀다.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을 양분한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 생산 라인은 국내 기업이 아닌 일본 기업 장비에 의존한다.

선행 개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해외 유수 장비·소재 기업과 달리 국내 기업들은 아직도 절대적 갑을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경쟁사나 해외 기업과 손잡으려면 절대 갑의 눈치를 봐야 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반면에 해외 유수 장비·소재 기업은 이런 제약이 없다. 세계적 반도체 제조사를 고객으로 뒀지만 적절한 힘의 균형을 유지한다. 완성도 높은 후방 기술이 없으면 혁신적인 반도체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국내 상황과 달리 중국은 메모리반도체 기술력을 확보하는 데 혈안이다.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 인수까지 제안했다. 비메모리 분야에서는 지난 10년 이상 꾸준히 인력 양성과 기술 개발을 정부가 주도하고 있다. 그 결과 세계적인 반도체설계(팹리스) 기업들이 탄생했고 중소·벤처기업 수도 빠르게 늘었다.

기술·자본 경쟁의 높은 벽을 뛰어넘기 위해 세계적 기업들이 합종연횡을 한다. 중견·중소기업이 대부분인 국내 반도체 후방산업은 기술과 자본 면에서 이런 경쟁이 불리하다.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실패 확률이 높은 중장기 연구개발 투자는 꺼린다.

반도체는 기업 간 경쟁이 아닌 국가 간 경쟁으로 바뀌었다. 한국과 미국의 맞경쟁 속에 중국이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기업에만 맡겨두면 몇 년 뒤에 위험이 닥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정부는 반도체 산업 실태조사를 서둘러야 한다. 부처 간 다툼을 벌일 때가 아니다. 지금이 투자할 때인지 기업에 맡겨둘 때인지 명확히 근거를 찾아야 한다. 이미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는 말로, 민간 자율에 맡겨둬도 된다는 말로 변명해서는 안된다. 예산확보 못한 것을, 시장조사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핑계로 삼지 말아야 한다.

배옥진기자 witho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