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7주년:기술독립선언III] 생태계가 튼튼해야 오래간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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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는 곧 기회다. 하지만 모든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위기만큼 강도 높은 노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한일 경제전쟁으로 반도체 등 핵심 산업이 위기를 맞았지만 우리 산업 생태계 현주소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산업 근간이 되는 소재·부품·장비 산업이 너무 취약했다. 나아가 이를 위한 생태계가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정부는 매년 수조원을 기술 개발에 쏟아 부었지만 산업으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그 사이 기초 학문 연구 수준을 강화하지도 못했다.

일본에 의존했던 반도체 공정에 필요한 소재 수입이 막히자 우리 산업 취약점이 그대로 드러났다. 생태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단기간에 회복하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본적으로 우리의 인재 양성 방식, 연구개발 방식도 문제가 있음을 반성하는 계기가 됐다.

다시 이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생태계 구축이 시급하다. 정부, 기업, 대학, 연구소 모두가 나섰다.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다. 위기를 만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다보면 그 과정에서 오히려 기존 상황보다 더 업그레이드된 경쟁력을 갖게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생태계 구성원 간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가장 밑단은 인재를 양성하고 기초 연구를 하는 대학이다. 대학은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대학 연구개발과 산학협력 형태가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대학은 실적과 평가를 위한 논문 중심 연구에 머물렀다. 주요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 개수가 평가에 중요한 지표가 됐기 때문이다. 산업계에서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는 뒷전이었다. 기업 역시 대가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고 인재 양성에 무관심했다. 국책연구소마저도 기초 연구보다 당장 이슈가 되는 기술 개발에 휩쓸렸다는 반성이 산학연 전문가 입을 통해 흘러나온다.

김상동 경북대 총장은 최근 한 포럼에서 “일본의 대한 무역 규제로 인한 한국 산업의 대외 의존성과 산업 구조 취약성 문제가 현실로 대두됐다”면서 “우리나라도 장기적이고 도전적인 연구개발 촉진과 인재 양성을 위해 기존의 산학협력 모델을 혁신하고 지역과 산업에 밀착하는 고등 교육 연구기술 개발 플랫폼 구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위기를 기회로 바꿀 요소는 있다. 건강한 첨단 산업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토양이 만들어졌다. 한 나라에 치우쳐진 의존 관계는 건강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인식이다. 협력과 연구, 인재 양성 환경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문화요, 인식이다. 가장 어려운 인식 전환을 한·일 경제전쟁 덕에 이룰 수 있었다.

훌륭한 인적, 사회적 자원을 가진 것도 도약을 가능케 하는 요소다. 대학의 자원과 역량은 풍부하다. 급속한 변화와 치열한 경쟁을 겪고 있는 산업체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으나 산학협력보다는 학문적 성과에 치우친 탓이 크다.

그럼에도 수십년 동안 국산화에 도전하면서 경쟁력을 다져온 연구진이 많다. 이제야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이 산업계와 공고한 협력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뒷받침이 필요하다.

연구 관행도 달라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정책 역시 바뀌어야 한다. 대학 연구개발 자금 80%가 정부 재정 지원에 의존한다. 정부의 평가방식, 연구 주제, 지원 대상 모두 혁신해야 한다.

김진경 국가교육회의 의장은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대학이 원천기술을 개발하는 거점 역할을 해야 한다”면서 “국제 기술주도권 강화를 위해서는 기술 축적을 위한 장기적이고 일관된 정책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시절 '부위정경(扶危定傾)'이라는 사자성어가 회자됐다. 중국의 사서인 '주서'에 나오는 말이다. 위기가 찾아오자 잘못된 것을 바로 세워 나라를 바로 세운다는 뜻이다.

김원용 전국대학교산학협력단장·연구처장협의회장은 “링크플러스나 브리지 사업 등 새로운 정부 정책 영향으로 대학도 산학협력·융합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면서 “이번 사태를 계기로 대학 연구 성과물 평가 방식을 비롯해 기업체가 대학 성과와 지식재산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등 많은 문제점을 바로잡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문보경기자 okm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