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27>과학기술연구소 준공…과학기술 산실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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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1969년 10월 23일 서울 성북구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열린 준공식에서 최형섭 초대소장에게 연구소기를 전달하고 있다. <KIST 제공>
<박정희 대통령이 1969년 10월 23일 서울 성북구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열린 준공식에서 최형섭 초대소장에게 연구소기를 전달하고 있다. >

황금빛 들녘에 가을걷이가 한창이던 1969년 10월 23일.

빨강과 노랑 등 오색 단풍이 전국 산하를 짙게 채색한 가운데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홍릉 소재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앞 광장에는 오후 1시부터 검은색 승용차들이 줄을 이어 도착했다. 이날 오후 2시 연구소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한 내외 귀빈들의 차량 행렬이었다.

오후 2시 10분 전쯤. 박정희 대통령이 탄 차량이 경호 차량의 안내를 받으며 도착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부인 육영수 여사는 최형섭 한국과학기술연구소장의 안내로 단상에 올라 가운데 좌석에 앉았다.

이날 연구소 준공식에는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과 김기형 과학기술처 장관을 비롯한 국무위원, 주한 외국 외교사절, 과학기술계·학계·산업계 인사 등 1000여명이 참석했다.

장내를 정리한 사회자가 개회를 선언했다.

“지금부터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준공식을 거행하겠습니다. 내빈께서는 국기를 향해 일어나 주십시오.”

이날 준공식은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연구소기(旗) 수여, 표창장 수여, 최형섭 소장의 식사, 대통령 치사 순으로 진행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 진흥은 경제발전의 동력이며 국력의 척도”라면서 “낙후한 우리 과학기술이 선진국과 대등한 수준으로 향상되도록 결의를 다지고 분발하자”고 강조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국민은 과학기술 개발에서 어느 민족보다 재능이 우수하다”면서 “이제 일정한 수준 이상의 사업장에는 기능공 훈련장이 있어야 하며, 우리 모두가 과학자를 아끼고 과학을 생활화하는 국민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연구소는 국내외에서 우수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한 과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연구개발에 심혈을 기울이는 연찬의 도장으로서, 다른 연구기관과 협동의 광장으로서, 산·학 일체의 심장부로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진흥과 경제개발 및 국력 증강을 위해 막중한 사명을 수행해 달라”고 당부했다.

최형섭 연구소장은 식사를 통해 “동양 제일의 국제 수준을 지향하는 우리 연구소가 짊어진 무거운 사명감을 통감한다”면서 “국가 발전을 위한 과학기술 개발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윌리엄 포터 주한 미국 대사는 축사에서 “최신 시설의 연구소 준공식이 한국과학의 새로운 미래를 약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기술을 상징하는 톱니바퀴 속에 기어가 들어간 마크를 넣은 연구소기(旗)를 최형섭 소장에게 수여했다. 또 연구소 건설에 공이 많은 육군 공사조정통제단장 장세창 대령 등을 표창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준공식이 끝나자 최형섭 소장 등과 함께 연구소 기념탑을 제막하고 최형섭 소장, 헨리 코스탠조 주한 유솜(USOM)처장 등과 함께 개관 테이프를 끊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행사 후 본관 식당에서 참석자들을 위한 축하연을 베풀고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체신부는 이날 연구소 준공을 축하하는 기념우표 100만장을 발행했고, 전매청은 신탄진 200만갑에 연구소 전경 사진을 넣은 기념 담배를 판매했다.

연구소 설립안을 입안한 전상근 삼전복지재단 이사장(당시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장)의 회고.

“이날 준공식을 지켜보면서 소중하게 기른 귀여운 딸을 시집보내는 어버이의 심정이었다. '기술연구소여, 부디 과학한국의 상징으로 발전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1966년 10월 6일. 첫 삽을 뜬 지 3년여 만인 이날 준공한 연구소는 동양 최대·최신 현대 시설이었다.

그동안 총공사비로 당시로선 거액인 67억원이 들어갔다. 이 가운데 외자는 27억원이었다. 대지만 8만3000여평이고, 총 건평은 1만2000여평이었다. 한국 과학기술의 메카로서 부족함이 없는 시설이었다.

연구소 건물 설계는 국내 2개 업체를 선정해 맡겼다. 연구동을 비롯한 실험실과 공장 설계는 무애건축연구소(대표 이광노), 본관과 주거시설 설계는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대표 김수근)가 각각 담당했다. 이광노 대표와 김수근 대표는 한국 현대건축을 선도한 주역들이었다. 김수근 대표가 설계한 본관 건물은 노출공법으로 지었다. 이 건물은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서울시가 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공사는 신성공업과 신흥건설, 도로포장은 고려건설, 조경공사는 한국원예가 각각 담당했다.

본관에는 각 행정부서와 기술정보실, 국내 최고 성능의 초대형 컴퓨터(CDC3300)를 설치한 전산실, 도서관, 강당과 회의실, 실험시설이 필요 없는 연구실 등이 입주했다.

2251평 규모의 제1연구실에는 주로 전자와 식품, 화학 부문 연구실과 분석실, 재료시험실이 들어섰다. 1500평 규모의 공작공장에는 산업연구에 필요한 정밀기기 제작 체제를 완비했다.

1700여평 규모의 제2연구실은 주로 재료와 금속, 화공 부문 연구실이 입주했다. 이외에 영빈관, 지하 1층~지상 5층의 제1아파트, 지하 1층~지상 2층의 연립주택, 기숙사 등도 준공해 연구원들이 입주했다.

정부와 연구소는 처음에는 신축 공사를 1968년까지 끝낸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공사는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모든 공사를 한국이 일방적으로 진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미 양국은 연구소 설립과 운영에 관해 공동으로 추진한다는 협정을 체결했고, 자매기관인 미국 바텔기념연구소와 기술용역 계약도 맺었다. 이 같은 계약에 따라 한국 측은 미국 측을 대표한 바텔기념연구소를 비롯해 미국 ACMA와 모든 사항을 협의해서 진행하다 보니 공사 전반이 늦어졌다. 여기에 외자 도입도 일부 차질을 빚었다.

신축 공사에 참여한 과학기술연구소 관계자의 증언.

“연구소 신축 공사는 모든 과정을 한국과 미국이 협의해서 진행했어요. 그 와중에 외자 도입도 일부 차질을 빚었어요. 연구소 공사를 우리 계획대로 진행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연구소 신축에 온갖 정성을 쏟았다. 미국 국제개발처(AID) 원조금으로 수입하는 연구소 건설용 기자재와 시설용품은 관세를 모두 면제토록 조치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수시로 연구소를 방문해 현장 실무자들로부터 공사 진행 상황을 보고받고 연구원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공사 현장 인부에게는 금일봉을 주며 이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소장)의 회고록 증언.

“연구소가 자리 잡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설립 후 3년 동안 적어도 한 달에 한두 번씩은 꼭 연구소를 방문했다. 박 대통령은 연구원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눠 연구소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 주셨다. 연구동 신축현장 인부들에게는 금일봉도 돌렸다. 공사 중 다른 부처 장관들이 연구소 일에 반대할 때마다 방패막이가 돼 주셨다. 대통령이 연구소에 자주 온다는 것만으로도 대외에 미치는 영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 발전사를 연구한 미국 스티븐 데디예 박사가 그의 논문 '후진국 과학의 후진성'에서 주장하듯 '개발도상국에서 과학기술 발전은 국가원수가 선두에 서서 이를 적극 지원하지 않으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실감했다.(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박정희 대통령의 이런 모습을 본 당시 과학계에서는 “조선시대 장영실 뒤에 세종대왕이 있었다면 과학기술연구소 뒤엔 박정희 대통령이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공사가 생각보다 지지부진하자 육군 공병감에게 “공병 장교들로 육군공사조정통제단을 구성해서 현장에 파견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 지시로 공사조정통제단은 1967년 3월 13일부터 공사 현장 근무를 시작했다.

단장에는 장세창 대령이 임명됐다. 통제단은 토목·건축·기계·전기 분야별 전문가인 영관급과 위관급 장교 6명으로 구성했다. 이들은 홍릉 공사 현장에 별도 사무실을 마련해서 상주하며 연구소 직원과 함께 공사를 독려하고 건설 현장 인력을 관리했다.

도정섭 전 기술연구소 행정처장의 기억.

“이들은 날마다 공사 진도를 확인하고 매주 그 결과를 청와대에 보고했습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통제단에 업무 협의차 갔더니 그들이 라면을 끓이고 있었어요. 그때 처음 라면을 먹어 봤습니다. 통제단은 토목정지 공사와 현장 관리에 남다른 성과를 냈고, 공사를 앞당기는 데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통제단은 연구소를 준공한 후 1969년 12월 3일 철수했다.

연구소도 1967년 8월 9일 원활한 건설 공사를 위해 내부에 건설추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운영했다. 위원장은 신응균 행정부소장이 맡았다. 신응균 부소장은 육군 중장으로 예편해 주 터키 대사, 국방부 차관, 주 서독대사 등을 역임했다. 행정부소장 후에는 초대 국방과학연구소장을 지냈다. 위원회는 연구원을 대표한 한상준 박사와 민경식 시설과장, 이민하 관리부장, 장세창 육군 공사조정통제단장, 바텔기념연구사업소 대표 등 6명으로 구성됐다. 간사는 홍승민 씨가 맡았다. 신응균 부소장이 군 장성 출신이어서 통제단과의 업무 협조는 일사불란하게 이뤄졌다.

건설추진위원회는 주로 건설종합계획의 변동이나 공사 우선순위, 건설비 운용, 기타 건설 현장에서 발생하는 제반 문제점을 심의해 해결했다. 위원회는 1970년 8월 14일까지 연구소 내 건설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처리했다.

온 국민의 기대 속에 준공식을 가진 연구소는 한국 과학기술 연구의 산실로서 과학기술 강국을 향한 힘찬 레이스를 시작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