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59>과학기술 미래 씨앗 '전국민 과학화 운동'

1979년 7월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정상천 서울시장을 비롯해 과학기술자, 새마을 지도자 등 각계대표 4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민 과학화 운동 중앙촉진대회가 열렸다. <국가기록원 제공>
1979년 7월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정상천 서울시장을 비롯해 과학기술자, 새마을 지도자 등 각계대표 4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민 과학화 운동 중앙촉진대회가 열렸다. <국가기록원 제공>

박정희 대통령이 주창한 전국민 과학화 운동은 한국 과학기술의 미래 씨앗이었다. 과학기술처와 각 부처는 매년 사업계획을 수립해서 과학화 운동을 실천했다. 민·관의 노력으로 전국민 과학화 운동은 농어촌과 직장, 학교, 공장 등으로 들불처럼 확산했다. 그 과정에서 이런 일도 있었다.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의 회고. “이 운동을 전개하면서 거듭 개발도상국에서 대통령의 역할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절감했다. 어느 날 문교부 국장이 나를 찾아와서 하소연했다. '장관님, 문제가 있습니다. 박 대통령께서 과학화 운동을 주창한 이후 학교와 각 산하기관에서 과학화 운동에만 매달려 문교부에서 지시하는 사항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이를 어쩌면 좋겠습니까.'”(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행복한 하소연이었다.

1979년 2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오후 과학기술처를 연두순시하고 새해 업무계획을 보고받았다. 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전국민 과학화 운동을 지금보다 더 확대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박 대통령은 “앞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는 과학기술이 가장 발전한 나라가 될 것”이라면서 “과학기술 진흥은 경제발전과 수출 증대에도 필요하지만 고도산업 사회에서 전 국민이 과학을 생활화하도록 방송과 신문을 통해 기초 과학기술을 익히도록 계도하고 반상회 등에서 간단한 기계 사용법이나 전기 기술을 주민들이 배워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최종완 과학기술처 장관은 올해를 '선진 과학기술 도약의 해'로 정해서 △전국민 과학화 운동 △중화학공업 기술 자력 기반 구축 △획기적 과학기술 발전 전략 수립 △고급 과학기술 두뇌 양성 등을 중점 추진하겠다고 보고했다.

2월 15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는 이날 과총회관에서 정기총회를 열고 전국민 과학화 운동 정착 등 3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과총은 과학기술계 인사 200여명이 참석한 총회에서 △전국민 과학화 운동을 범국민 운동으로 정착토록 하고 △과학화 운동의 핵심 역군으로 과학화 정신 함양과 보급에 나서며 △합리적인 생활 과학화 실천에 과학자들이 중추 역할을 담당할 것을 결의했다.

4월 13일. 최규하 국무총리 주재로 이날 중앙청 회의실에서 열린 종합과학심의회는 과학기술처가 마련한 '전국민 과학화 운동 기본계획'을 심의, 확정했다. 회의에는 관계 부처 장관과 과총 회장, 한국과학기술연구소장, 서울대 총장 등이 참석했다. 정부는 이 운동을 범부처 차원에서 새마을운동 2단계의 범국민 운동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과학기술처에 과학화 운동 추진본부를 두고 부처마다 전담부서를 지정해 정부 내 14개 부·처·청에서 추진할 과학화 운동과 기술 보급, 현지 기술지도 등 주요 과학화 사업을 확정했다. 또 과학화 운동 범위를 취학 전 아동을 비롯해 청소년·대학·농어민·산업계·과학기술인 등으로 확대, 각종 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정부는 과학기술처 주관으로 5월부터 10개 시·도별 과학화 국민촉진대회를 개최키로 했다. 과학기술처는 언론을 통한 계몽과 캠페인, 과학화 국민촉진대회 개최, 주부생활 과학강좌 진행, 과학영화 순회 상영, 계몽자료 보급, 농어촌 기술지도, 1마을 1과학자 기술결연, 과학의 달 행사 등을 진행하기로 했다.

문교부는 교과서 개편과 과학공부 570만부 발간, 35개 종목 실기경진 대회, 과학교사 재교육, 66개 중학교에 기술교실 운영, 주부교실 운영, 과학고 설립, 대학 기초자연과학교육과 연구기능 강화 등을 추진키로 했다. 새마을운동 주무 부서인 내무부는 반상회를 통한 과학지식 보급, 저소득 마을 기술결연 지도 등을 담당키로 했다. 법무부는 재소자에 대한 직업기술 훈련, 국방부는 장병 1인 1기 교육(37개 기능직종 4400명)과 군기술 교관위탁 교육을 실시키로 했다.

농수산부는 농기계서비스센터 50곳 추가 설치, 새마을부녀자 대상 농기계 훈련을 실시하기로 했다. 상공부는 과학기술전시회 개최, 동력자원부는 전기안전 사고방지 계몽, 보사부는 보건위생 계몽과 여성생활 교양 교육을 각각 담당키로 했다. 문화공보부는 신문·방송에 생활과학 프로 설치 운영과 새마을운동 홍보영화 제작, 새마을 기술방송을 확대하기로 했다. 농촌진흥청은 농어촌 대상 농기계 기술을 보급하기로 했다. 수산청은 어촌주민들에게 수산 기술 보급을 담당하기로 햇다. 특허청은 우수발명 장려와 특허 표어·포스터 모집, 공업소유권 지도계몽 활동을 하기로 했다. 공업진흥청은 미터법 사용 홍보와 KS규격 설명회(100회)를 개최키로 했다.

과학영화 제작과 관련한 일화 하나. 과학기술처는 과학영화 제작을 위한 예산 2000만원을 경제기획원에 신청했다. 이 무렵 일본 도쿄에서 아시아 각국이 제작한 과학영화 시사회가 열렸다. 당시 장상권 과학기술처 조성과장이 장관 결재를 받아 이 시사회에 참석했다. 당시는 해외 출장 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사전 허가를 받아야 했다. 장 과장은 시사회에서 중국 측과 과학기술 영화를 제작해서 상호 교류키로 합의하고 귀국했다. 장관에게 보고서도 제출했다.

장상권 당시 조성과장의 증언. “귀국해 보니 기획원에서 영화 제작 예산을 전액 삭감했어요. 기획원 실무진과 이야기해도 반영할 도리가 없다는 겁니다. 난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획원에서 예산국장이 찾으니 '빨리 오라'는 겁니다. 예산국장실에 갔더니 서류를 하나 건네더군요. 뭔가 하고 봤더니 제 출장 보고서 사본에 김재규 당시 중앙정부보장이 '영화제작 예산을 책정해 주라'며 서명한 서류였습니다. 그로 인해 과학기술처 예산에 영화 제작비를 확보했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실세 중 실세였다. 그의 서명이 삭감된 과학영화 예산을 되살린 것이다.

5월 10일. 과학기술처가 과학화 운동 촉진을 위해 10개 시·도별로 개최키로 한 첫 '전국민 과학화 운동 촉진대회'가 대전에서 열렸다. 대회에는 최종완 과학기술처 장관을 비롯해 도지사, 지역 대학 총장, 과학기술인, 과학담당 교사, 새마을지도자, 여성단체 회원, 일반 시민 등 2000여명이 참석했다. 대회는 결의문 채택과 과학영화상영, 기술강연회 등으로 진행됐다. 촉진대회는 대구, 부산, 마산, 광주, 전주, 춘천, 제주, 수원, 청주 순으로 개최했다.

6월 23일. 문교부는 과학학교 설립을 위해 설립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문교부는 김기형 전 과학기술처 장관과 이영덕 한국교육개발원장, 이태령 서울대 교수 등 13명을 위원으로 위촉했다. 문교부는 1983년 과학 전문 지식을 가르치는 경기과학고를 국내 처음 설립했다. 이후 전국에 과학고를 설립했고, 현재 20개 과학고가 운영되고 있다.

7월 10일. 과학기술처는 이날 전국민 과학화 운동 중앙촉진대회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했다. 대회에는 최종완 과학기술처 장관, 정상천 서울시장, 과총 회장, 전국 과학자, 각급 학교장, 새마을지도자 등 4000여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생활 과학화를 실천하고 이를 전국에 보급하는 데 앞장설 것을 다짐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9월 29일. 과총은 KBS와 공동으로 제1회 서울시민 과학의 밤을 개최했다. 과총은 이외에 전국민 과학화 표어 모집, 과학자 모교방문 강연회, 생활과학 강좌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다.

같은 해 11월 14일. 과학기술처는 범국민 과학화 운동을 촉진하기 위해 시·도별로 시범 과학학교를 지정·육성하고 지방 과학관을 확대 설치키로 했다. 창의과학재단은 과학필름 도서관 설치, 과학영화 전국 초·중·고등학교 상영, 과학문고 발간, 과학기술 지방순회 강연, 주부 생활 강좌, 과학책 일기 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최종완 전 과학기술처 장관의 생전 회고. “과학화 운동은 우리 사회 저변에 깔린 비합리성과 비효율성을 고치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다. 이 운동은 국민의식 개혁 차원에서도 지속해야 할 계몽운동이었다.” 전국민 과학화 운동은 10·26 사태 이후 1980년대 들어와 민간 주도로 전환됐다. 이 운동은 과학기술 대중화의 이정표를 제시했고, 과학기술 중심사회로 가는 미래 씨앗이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