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산업부터 규제 풀자](9)융합, 통(通)해야 통(統)한다

[신산업부터 규제 풀자](9)융합, 통(通)해야 통(統)한다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2020년 융합기술 R&D 과제 수 및 투자액 현황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이 전공별로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유머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과거의 코끼리는 한 전공만으로 넣을 수 있었는지 몰라도, 지금은 슈퍼 코끼리가 등장하고 냉장고 구조도 복잡해지는 등 어려움이 많아졌다. 미래 사회를 위해 각 산업의 융합기술이 필요한 시대를 맞아 칸막이를 벗어나 여럿이 머리를 맞대는 혁신은 나날이 중요해져만 간다. 복잡다단해지는 현대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융합연구 흐름과 이를 가로막는 요인에는 무엇이 있을까?

'융합'이란 서로 다른 틀을 허물어 새로운 무언가를 창출하는 것을 뜻한다. 무엇보다 융합이 중요한 이유는 창의력과 직결된다는 것이다. 창조성은 '연결(connectivity)'에서 시작된다. 본래 인간의 뇌는 과거에 없던 새로운 연결이 만들어지면서 창조적 생각을 하게 된다. 사회도 서로 다른 분야가 연결되면서 창조적 혁신이 일어나게 된다. 복잡해진 사회 문제를 해결해 나갈 열쇠는 '낯선 것들의 연결'에 달려 있다.

연결이 창조를 낳는다

지난 6월 본 연구원이 주관한 '데이터 기반 고독사 위험 예방 및 지원방안' 정책 세미나를 개최했을 때의 일이다. 기자를 포함한 많은 분께 과학기술을 다루는 우리 연구원에서 왜 복지영역인 '고독사'를 연구하느냐는 질문을 숱하게 받았다. '데이터 분석과 행동 감지 기술을 이용한 연구'라는 대답을 듣고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고독사 해법을 모색하면서 이 문제는 복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고독사 고위험군의 지정·관리에 관한 데이터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음을 발견하고 데이터에 기반한 더 정확한 분석과 촘촘한 고위험군 관리 방안을 마련하고자 했다.

고독사 위험 가구의 전력량을 감지하는 IoT 기반 스마트 플러그의 전자기술 세팅에서 몇 가지 문제도 발견됐다. 정신건강과 같은 보건의료 관련 지식, 영양학 관련 모니터링 등도 필요함을 제안했다. 이들 중 무엇 하나 빠져서는 안 되고 모두가 톱니바퀴처럼 정확히 맞물려 돌아가야 연구가 가능하다. 복지에 과학기술 등 다른 분야를 연결함으로써 새로운 '솔루션'이 도출되는 것이다. 인문 사회와 과학기술이 융합해서 만들 수 있는 가치는 이처럼 무한하다.

필자는 첨단 신산업 활성화를 위한 정책 수립 연구도 융합연구로 진행하고 있다. 정부는 그동안 신성장 동력을 발굴하고 육성하기 위해 정책 수립, 예산 투입, 지원센터 건립, 벤처캐피털(VC) 지원 등 다양한 노력을 해왔다. 정책수립 연구도 다수 수행됐는데 산업정책 전공자, 경제학 전공자의 영역이었다. 연구 내용은 세계 동향, 역사, 산업 관련 통계 제시 정도가 주였다. 사실 연구가 실제 산업 발전에 도움이 됐는지는 미지수다. 설령 산업 발전이 이뤄졌대도 과연 정부 지원 효과로 인한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신산업 정책 연구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장의 목소리와 수요를 정확하게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막상 진행해보니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첨단기술과 기업 형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조차 어려웠다. 현장에서도 해법을 찾지 못해 갑론을박 양상이었다. 신산업 지원방안 마련을 위해서는 기업 규모(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 등)나 업종, 설립 연도, 매출액 차이 등 다양한 요소를 모두 고려해야 했기에 데이터 분석력과 정교한 정책 입안 감각도 필요했다.

신산업 지원 방안을 위해서는 신기술 전문가뿐만 아니라 이것을 해석, 분석할 수 있는 전문가, 운영할 수 있는 회계 전문가, 투자 전문가, 금융 전문가, 인사 조직 전문가와 같은 여러 방면의 전문가가 모두 필요하다. 무엇보다 이것을 통합해 제안하고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리더가 필요했다. 모든 것이 성공적으로 맞물려 진행될 때 그 결과로 신산업 창출이 도출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결국 신산업 창출은 단지 새로운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것과 기존 것의 융합과정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었다.

융합연구 그 부진한 흐름

국내 융합연구개발 성과는 여전히 부진의 늪에 빠져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2020도 융합연구연감'에 의하면 2019년도 R&D 사업을 통한 SCI(E) 논문은 1만264편이 게재됐다. 특허 출원·등록 성과는 각각 6233건, 395건이었다. 이것을 정부 R&D 사업 전체에 대비해 봤을 때 논문 성과 비중은 24.5%, 특허 출원·등록 성과 비중도 겨우 17.1%와 1.8% 정도에 그쳤다. 과거에 비하면 투자액도 많이 늘어난 것으로 알지만 실제 통계를 보면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 KIST 융합연구정책센터의 '2020년도 국가융합기술 R&D 조사·분석'을 살펴보면 2020년도 융합기술 R&D 과제는 1만2475개로 정부 R&D(7만3501개) 대비 겨우 17.0%만을 차지할 뿐이었고, 투자도 3조2038억원으로 정부 R&D(23조8803억원) 대비 13.4% 수준에서 그쳤다. 과제당 투자액 또한 융합기술 R&D가 전체 R&D를 크게 하회했다.

[신산업부터 규제 풀자](9)융합, 통(通)해야 통(統)한다

벽을 넘어야 통합도 열린다

사실상 융합은 어려운 작업이다. 융합의 어려움은 필자 경험을 통해서도 절감한 부분이다. 혼자 하는 연구도 쉽지 않지만 둘 이상이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한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다른 분야 전문가가 모여 원활하게 '소통'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융합연구의 성공 여부는 다른 어떤 연구보다 연구자 간, 학제 간, 산학연 간 '협력 네트워크'가 크게 좌우한다. 융합연구정책센터가 현장의 융합연구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융합연구개발 활성화 설문조사'가 이런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융합연구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 '참여연구자 간 충분한 소통, 협력 부족'을 꼽는 답변이 40%에 달했다. '여러 분야 연구자 간 이해도 부족'을 꼽은 답변도 20.0%로 높아 '연구자 간 소통과 이해'의 문제가 가장 시급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융합 연구의 열쇠는 '소통력'이다. 벽 쌓기를 좋아하는 학계 분위기에서 학과 간 칸막이를 없애고 소통과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전공이라는 벽, 학연과 산업, 기술이라는 벽을 넘어 소통해야 한다. 우선 최대한 서로 함께하는 경험부터 축적해야 한다. 현장의 연구자는 연구의 물리적 거리를 좁히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학계, 기관, 학과 간에 인력의 이동이 자유로운 환경이 구축되면 소통을 위해 허비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소통 기회도 급증할 수 있다. 첨단기술 시대에 대면접촉이 시작점인 것이 역설적이다. 더 중요한 것은 'Hungry' 정신 부족에 있을지도 모른다. 국책연구원이나 대학 모두 현실에 안주해도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것을 내려놓고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이유가 없는 셈이다.

“나의 학습을 방해하는 유일한 훼방꾼은 내가 받은 교육이다”-아인슈타인

융합의 문제는 장기적으로는 교육으로 풀어야 한다. “오늘의 아이를 어제의 방법으로 가르치는 것은 아이의 미래를 훔치는 것이다”라고 한 교육개혁가 존 듀이(John Dewey)의 말이 떠오른다. 문·이과 칸막이 속에서 주입식, 평준화로 질주해온 낡은 교육 체제에서 과감히 전환해야 한다. 학문을 융합하고 학문 간 벽을 허문 미래지향적 교육과정이 필요하다. 이과와 문과로 분리된 장벽을 넘어 다른 분야의 학습이 많아져야 한다. 전공의 칸막이를 없애 서로 교차되고 융합될 수 있는 교육과정이 필요하다. 대학교육은 특정 학과에 따른 교양과 전공으로만 구분돼 다양한 분야를 접하는 기회가 부족하다.

창의융합형 인재 양성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국가 차원에서 많은 융합형 인재 확보가 필요하다. 초학제적 연구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전문가가 필요하다. 융합은 자신의 것에 전문적이되 다른 분야를 어느 정도 알아야 길이 열린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영역과 어떻게 함께할지 접근조차 하기 어렵다. 다른 분야의 관심과 함께 소통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전투란 정석으로 대응하고 변칙으로 승리한다. 변칙을 잘 끌어내면 하늘과 땅처럼 변화가 무궁무진하고 유유히 흐르는 강처럼 마르지 않는다.” 손자병법의 손자, 즉 손무(孫武)의 말이다. 손무는 오나라의 장군으로 백거 전투에서 아직 정규 전쟁에서 활용된 적 없는 수상 기동을 처음 생각해내 초나라를 멸국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역사적으로 전쟁에 지리학, 기상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를 적용하는 융합적 사고로 승리를 이끌어 낸 예는 적지 않다. 제갈량이 적벽대전에서 조조 군의 배를 연결해 화공하거나 이순신이 일본을 명량으로 유인, 주도권을 장악해 승리한 것도 그 예다. 비단 '융합'은 전쟁에만 국한되지 않고 마르지 않는 강처럼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근원이 된다.

임성은 서울기술연구원장 ych5534@sit.re.kr

<필자 소개>

임성은 원장은 서울시립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행정고시 출제·선정 위원, 서울특별시 연구실장 등을 역임했다. 서경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국책연구원 평가위원을 거쳐 현재 서울기술연구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