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71>대덕연구학원도시, 연구단지로 조정

박정희 대통령이 1978년 4월 19일 대덕전문연구단지를 방문, 관계자와 악수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박정희 대통령이 1978년 4월 19일 대덕전문연구단지를 방문, 관계자와 악수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76년 4월 2일. 식목일을 사흘 앞둔 날이었다. “새로운 국가계획사업으로 이 조정안을 각 부처에 시달(示達)해서 사업 추진에 차질이 없도록 하시오.”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집무실에서 오원철 청와대 경제2 수석비서관 겸 중화학 공업추진기획단장 주도로 만든 대덕전문연구단지 건설계획(조정안)을 재가하며 이같이 지시했다. 조정안은 박 대통령이 1개월여 전인 3월 10일 충남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 현장을 시찰한 뒤 내린 지시에 따라 청와대가 마련한 안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날 브리핑이 끝나자 배석한 오원철 경제2 수석비서관에게 “청와대 중심으로 국가 재정 규모를 감안해 학원도시 사업 투자 계획을 재조정하라”고 지시했다.

박 대통령 지시로 그동안 과학기술처가 주관하던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 사업은 청와대 중화학공업기획단으로 이관됐다. 동시에 연구학원도시건설추진위원회가 심의하던 도시건설 사업 심의도 중화학공업기획단으로 넘어갔다. 청와대 주도의 새로운 질서가 등장한 것이다.

박 대통령 지시로 건설 사업을 맡은 오원철 기획단장은 곧바로 밤을 하얗게 새우며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사업 계획을 전면 재조정한 건설계획(조정안)을 수립했다. 20여일 만에 박 대통령의 최종 재가를 받은 것이다.

서정만 전 국립중앙과학관장(당시 과학기술처 종합계획관실 과장)의 증언. “대통령의 현장방문 다음날 과학기술처에서 급히 전화 연락이 왔다. 당시 나는 일본에 출장 중이었다. 최형섭 장관 지시로 '출장 업무를 중단하고 빨리 귀국하라'는 내용이었다. 서둘러 일본 정부와 협의를 끝내고 일정을 앞당겨 귀국했다.”(과학대통령 박정희와 리더십)

과학기술처에서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사업 담당과장이던 서정만 종합계획관실 과장은 이튿날부터 과학기술처가 아닌 중화학공업기획단으로 출근했다. 각 부처에서 파견 나온 직원들이 기획단에서 매일 회의하면서 박 대통령 지시 내용에 맞는 건설계획 조정안을 수립했다. 서정만 전 국립중앙과학관장의 회고. “휴일도 없이 날마다 강행군을 했어요. 20여일간 주야로 작업을 했습니다. 명칭을 '대덕연구학원도시'에서 새로운 단지 개념인 '대덕전문연구단지'로 개칭했어요. 이렇게 만든 기본계획은 그해 4월 2일 박 대통령의 최종 재가를 받았습니다.”

오원철 수석이 기획단장인 중화학공업육성은 박정희 대통령이 역점을 둔 최우선 국정 과제였다. 박 대통령은 1973년 1월 12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 육성책과 범국민 과학화 운동을 국정 최우선 과제로 제시했다. “우리나라는 바야흐로 중화학공업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다른 하나는 전 국민 과학화 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입니다. 1980년대 가서 우리가 100억달러 수출 중화학공업 육성 등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범국민 과학기술 개발에 총력을 집중해야 하겠습니다.”

이후 정부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집중 추진하기 위해 그해 5월 14일 대통령령 제6675호로 국무총리 소속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를 설치했다. 위원장은 국무총리가 맡고 경제기획원 장관, 재무부 장관, 문교부 장관, 상공부 장관, 건설부 장관, 과학기술처 장관, 제2 무임소 장관 등 7명과 중화학공업에 관한 학식 및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 8명 등 15명 이내로 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사무를 총괄할 기획단을 두고 단장과 부단장 각 1명을 두기로 했다. 초대 단장은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이 맡았다. 그 뒤를 이어 1974년 2월부터 오원철 청와대 경제2 수석비서관이 기획단장으로 일했다. 오 수석은 상공부 과장, 공업국장, 기획관리실장, 광공전차관보를 역임했다. 오 수석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임은 각별했다.

김정렴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증언. “오 수석은 우리나라 공업화 정책 기획과 입안, 집행을 담당했다. 그는 독창적인 공학적 접근법으로 단시일 내 수입대체 산업, 경공업, 중화학공업, 방위산업을 순차적으로 육성했다. 박 대통령은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은 직접 챙기고자 했다. 경제2 수석비서관실을 신설하고 오 수석을 발탁해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담당토록 했다.”(박정희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한기익 당시 과학기술처 사무관의 증언. “오원철 수석은 과학기술처로 와서 회의를 자주 했습니다.”

그해 4월 14일. 청와대 비서실은 박 대통령이 재가한 '대덕전문연구단지 건설계획'을 관계기관에 시달했다. 이 또한 박 대통령 지시였다.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 명의의 이 공문을 국무총리실, 경제기획원, 재무부, 국방부, 문교부, 상공부, 건설부, 보건사회부, 체신부, 과학기술처로 내려보냈다. 청와대는 각 부처에 보낸 공문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계획을 대덕전문연구단지 건설계획으로 조정해 시행한다'고 밝혔다.

청와대가 수립한 조정안의 기본 내용은 크게 △기본방침 △단지계획 △연구소 건설 등으로 구분됐다. 청와대는 조정안에서 연구단지는 단계별로 정부 예산 범위 안에서 추진하며, 연구소는 일시에 건설하는 게 아니라 산업계가 요구하는 연구소부터 우선순위에 따라 단계적으로 건설한다고 밝혔다.

청와대가 조정한 대덕연구단지 건설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구소는 자립 운영을 원칙으로 한다. 연구소 투자는 최소화하고, 가능한 민간을 참여시키며, 연구소 운영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보조하지 않는다. △연구소 입지는 현재 안을 가능한 한 살리되 공업단지 조성계획과 같은 개념으로 조정한다. 도로 용수와 전기 공급 간선 건설은 정부 공사로 추진하며, 지원 시설에 대한 투자와 활용도를 고려해 간선도로 중심으로 집중화한다. △단지 내 도시 건설은 보류한다. 대전에 아파트를 건설해서 주거 문제를 해결하며, 단지 도시건설 수요가 있을 때 재검토한다. △단지 내 종합공대는 설립하지 않고 앞으로 대학원 입주를 고려한다. 충남대는 공대부터 단계적으로 단지로 이전한다. 국립이나 민간 연구소를 단지에 유치한다. △과학기술처는 종합기획만 하고 업무 소관에 따라 기존 부처가 예산 등 소관 업무를 전담한다. 원자력 연구소는 과학기술처, 선박연구소와 표준연구소는 상공부, 통신 전기연구소는 체신부, 정부 공사는 건설부가 각각 맡는다. 용수는 금강에서 취수해 공급하며, 대전시 상수도 공급은 취수장 완공 이후 추가로 검토한다. △아파트 단지 조성은 주택공사가 대지를 매입해서 수요자에게 분양 또는 임대한다. 조선연구소는 민간 유치, 해양개발연구소는 건설을 각각 보류한다. 전기와 통신연구소는 체신부가 설립한다. 석유화학연구소는 민간으로 출발한다. △선박연구소는 국내 조선업계 요구에 따라 기존 업무와 기계연구·해양연구·해군연구 업무를 추가한다. 민간 조선업계의 투자를 유도한다. 표준연구소는 기존 방침대로 추진한다. △국립지질광물연구소는 자원개발연구소로 개칭하고 지질조사와 광산조사, 해양자원 개발 업무를 추가한다. 기계연구소는 상공부의 금속시험연구와 통합해 창원기계공업단지에 기계연구소를 설립한다. 석유화학연구소는 민간기업 공동 출자인 중앙연구소를 설립하고, 이를 중심으로 석유·비료 및 합성수지 등 위성연구소를 설립한다. △전자통신연구소는 대덕단지에 입주한다. 전자교환연구소 신설은 전자통신연구소가 담당할 것인지 별도 연구소 설립 여부를 검토해서 결정한다. 전자연구소는 구미전자단지에 건설하며, 전자업계가 운영한다. △연구소·공동시설 업무와 예산은 조정안으로 진행하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추가 예산 요구를 하지 않는다.

조정안을 마련한 오원철 수석에 대한 과학기술계의 불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로,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전상근 삼전복지재단 이사장(당시 과학기술처 종합기획실장)의 회고록 술회. “오 수석은 애초 연구학원도시 계획을 마구 조정했다. 연구학원도시는 연구단지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과학자들이 안주할 주택 계획도 여지없이 날아가 버렸다. 최형섭 장관이 구상한 연구하는 푸른 공원도시의 꿈은 한여름 구름처럼 날아가 버렸다.”(한국의 과학기술개발)

청와대가 연구단지 사업을 직접 챙기자 그동안 소극적이던 각 부처의 태도가 확 달라졌다. 느슨하던 사업 추진에 가속도가 붙고, 부처 업무 협조도 신속해졌다. 새 질서의 시작이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