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기술 빼앗기는 中企…민관 협의체 꾸려 피해 줄여야

5년간 중기 기술유출 신고 2건뿐
대기업 상대 침해사실 입증 힘들고
오랜 분쟁기간·막대한 비용 걸림돌

[신년기획]기술 빼앗기는 中企…민관 협의체 꾸려 피해 줄여야

1975년 설립된 중소기업 삼영기계는 엔진 부품 제조업체다. 삼영기계는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세계 선박회사에 엔진 부품인 피스톤을 공급하며 기업을 키워왔다. 이 회사는 현대중공업 선박 엔진에 들어가는 실린더 헤드를 비롯한 다양한 부품을 국산화한 공로로 포상도 획득했다.

수년째 이어지던 협력관계는 현대중공업이 납품업체를 이원화하는 과정에서 틀어졌다. 삼영기계는 현대중공업이 자사와 공동개발한 피스톤 설계도면을 다른 중소기업에게 무단제공했다며 수년간 소송을 치렀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민사사건 3건, 형사사건 4건, 행정소송 3건, 행정기관 신고사건까지 총 2건으로 12건 분쟁이 동시에 진행됐다.

소송 비용도 수억원에 이르는 기술분쟁에 출구가 보인 것은 정부 행정조사 덕분이었다. 공무원이 직접 참여하는 현장조사와 침해판단 및 손해액 산정이 동반되는 만큼 당사자간 의견차이가 큰 사건 처리에 용이했다. 손해배상과 위로금 지급으로 팽팽하게 요구사항이 갈렸던 양측은 결국 최종 합의에 이르렀고, 현재도 두 기업은 협력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현대중공업과 삼영기계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기술분쟁에는 적지 않은 기간이 소요된다. 실제 2014년부터 2019년까지 6년간 기술분쟁 기간 동안 삼영기계는 총 209억원 누적적자를 기록했다. 중소기업이 감당하기 쉽지 않은 비용이다. 기술침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만도 사실조사·침해 판단·손해액 산정 등 복잡하다.

◇강소기업도 못 버틴다…“기술분쟁 대응 민·관 거버넌스 마련해야”

기술분쟁 해결은 쉽지 않다. 행정조사 제도가 도입된지 3년여가 지나서야 첫 합의사례가 나왔다는 사실은 오히려 기술분쟁 해결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역설하는 증거다. 실제 현대중공업과 삼영기계 이후 합의가 성사된 사례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2021년 중소기업 기술유출 실태조사에 따르면 현대중공업과 삼영기계와 같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기술분쟁은 가장 적은 유형을 차지한다. 지난해 발생한 기술유출 사례 가운데 '부당한 기술 또는 경영상 정보 제공 및 제3자의 유용' 유형은 5.8%에 그친다. 외부인, 특히 대기업에 의한 기술유출과 기술분쟁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고 묻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공개한 2017년부터 2021년 상반기까지 기술유용행위 적발 현황을 살펴보면 기술유출행위 사건은 총 14건에 그쳤다. 최근 5년간 대기업에 의한 중소기업 기술탈취 신고는 단 2건에 불과했다. 분쟁이 일어나더라도 쉽사리 신고에 나서지 못하는 구조다. 중소기업이 기술유출 피해를 주장하더라도 이를 입증할 증거가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중소기업 SJ이노테크와 한화 사이 기술탈취 분쟁은 기술자료 보유 여부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사례다. SJ이노테크와 한화는 기술유출 여부를 두고 수년째 소송을 이어오고 있다. SJ이노테크 측에서는 2011년부터 여섯 차례에 걸쳐 핵심 기술자료를 한화에 넘긴 뒤 2014년부터 한화가 인력을 투입해 SJ이노테크와 유사한 제품을 자체 개발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2015년부터 한화는 이 회사와 하도급계약을 해지했다.

1심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SJ이노테크 주장은 2심에서 뒤집혔다. 2심 재판부는 SJ이노테크에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한화에 제공한 부품목록이 기술자료로 인정받은 것이 주효했다. 이 소송은 현재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 대법원에서도 자체 개발 여부 등이 핵심 쟁점으로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이 소송에서 SJ이노테크에 대한 무료 법률지원에 나선 재단법인 경청의 장태관 이사장은 “SJ이노테크 정도 강소기업이 아닌 대다수 중소기업이라면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하더라도 3심까지 이어지는 분쟁을 버티기 어렵고, 수사기관이나 법원에서도 기술에 대한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 어렵다”면서 “법적 분쟁을 되풀이하기보다는 조정 제도를 통해 사전에 피해를 줄이도록 정부가 기술침해평가위원회와 같은 전문가로 구성된 합의체를 꾸리는 방식으로 기술침해에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인력유출에 따른 기술유출 “사전대비가 필수”

내부자로 인한 기술유출 역시 중소기업에는 골칫거리다. 중소기업 기술유출 절반 이상은 '내부직원에 의한 유출'이 원인이다. 내부인력에 의한 유출 사건의은 기업 사전 대비만 있다면 외부자로 인한 유출에 비해 기술침해 여부를 가리는 일이 용이하다.

정부가 기술보호를 위해 제공하는 서비스는 기술임치, 중소기업 기술보호 현장컨설팅, 법률자문 등이다. 중소벤처기업부는 기술보호지원반을 가동하고 있고, 특허청은 경업금지약정 제도를 운영한다. 공정위도 익명제보시스템 등 다양한 사전예방 수단을 제공한다. 프린터 워터마크와 대외비 문서 출력 시 결재를 받도록 하는 기술유출방지시스템 구축도 정부가 지원하는 기술보호사업이다. 최대 4000만원 범위에서 물리·기술적 보안솔루션 구축 비용 절반을 지원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합의하에 핵심 기술자료를 대·중소기업·농어업협력재단에 보관하는 '기술임치' 제도도 있다. 임치를 통해 기술개발 사실과 보유 시점을 입증할 수 있어 내외부 기술분쟁이 발생할 경우 임치 자체를 개발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 중기부에서는 주로 기술임치 사실을 근거로 삼아 기술보호지원반 법률자문과 분쟁조정, 기술침해행정조사 등 시정조치에 나서고 있다.

정부 차원 다양한 사전예방 장치에도 중소기업 기술유출에 대한 사전 대비는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다. 협력재단에 따르면 중견·대기업 경우 임직원에 대한 비밀유지서약서 체결 비율이 90% 이상인 반면에 중소기업은 63.2%에 불과하다.

퇴사직원 경쟁업체 전직을 막기 위한 경업금지 약정 체결 비율도 24.3%에 그친다. 경업금지 약정은 근로자가 사용자와 경쟁 관계에 있는 업체에 취업하거나 스스로 경쟁업체를 설립·운영하는 등 경쟁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약정 또는 계약이다. 경업금지약정서에는 경업금지에 상응하는 보상 내용을 포함해야 한다.

중기부 관계자는 “중소기업 기술보호를 위해 다양한 제도적 지원 장치를 준비하고 있다”면서 “기술유출을 막기 위해서는 중소기업도 사전에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유근일기자 ryury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