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그날이 왔다. 1980년 11월 13일. 이정오 과학기술처 장관은 이날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과학기술계의 가장 큰 관심사인 정부출연연구기관을 통폐합하는 '연구개발체제 정비와 운영 개선 방안'을 발표했다. 과학기술처 기자실은 연구기관 통폐합에 대한 과학기술계의 높은 관심도를 반영하듯 취재 기자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이 장관은 차분한 목소리로 “정부는 국가 전체의 연구개발 능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지금까지 각 부처로 분산된 16개 과학기술계 정부출연연구기관을 8개로 통합 조정하고 소관 부처를 과학기술처로 이관키로 확정했다”고 발표했다. 이 장관은 “한국과학원,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부설 해양개발연구소를 통합해 한국과학기술원으로 출범한다”고 말했다.
이 장관이 밝힌 통합 정부출연연구기관은 과학기술처 산하 5개, 상공부 산하 5개, 동력자원부 산하 3개, 재무부 산하 2개, 체신부 산하 1개 등 모두 16개였다. 정부는 이들 연구기관을 8개 대단위 연구기관으로 통합 조정키로 했다.
이 장관은 “통폐합 작업은 연내 마무리하며, △현재 추진하고 있는 위탁연구사업은 계속하고 △기관 간 통합은 연구인력이나 시설 유출, 유휴화가 되지 않도록 인력과 업무 배정을 무리 없이 추진하겠다”고 설명했다. 이 장관은 또 “연구기관 조직을 이원화해서 기존 과학기술 조직과 프로젝트 중심 조직으로 나누며, 연구 실적에 따라 우수한 연구팀과 기관에 대해서는 연구 장려금을 지급하는 등 과감한 연구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이 장관은 구체적인 출연연구기관 통합조정 지침도 밝혔다. 통합 지침은 △모든 이공계 출연연구기관은 과학기술 종합계획 수립과 행정 총괄 업무를 담당하는 과학기술처로 이관하며, △단위 연구소는 운영 능력과 관리 폭을 감안해 능률적인 관리 운영이 가능한 적정 규모로 통합하고 교육과 국가 개발과제 해결, 산업계 기술 지원 등 연구기관이 담당한 기능은 유사한 곳과 통합하되 기관 규모가 커지면 분산 독립한다. △각 연구 기능은 통합하고, 시험·검사·검정 업무는 국립공업시험원(현 국가기술표준원) 등 관련 시험검사기관으로 이관한다 등이었다.
이 장관이 통합하기로 밝힌 연구소는 아래와 같다.(괄호 안은 통합 대상 출연연구기관) △한국과학기술원(한국과학원,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부설 해양개발연구소) △한국전기통신연구소(한국전자기술연구소,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 한국통신기술연구소) △한국에너지연구소(한국원자력연구소, 한국핵연료공단) △한국동력자원연구소(한국자원개발연구소, 한국종합에너지연구소) △한국표준연구소 △한국기계연구소(한국기계연구소, 한국선박연구소) △한국화학연구소 △한국인삼·연초연구소(고려인삼연구소, 한국연초연구소)
과학기술처는 발표에 앞서 11월 10일 '연구개발체 정비와 운영 개선 방안'에 대해 전두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과학기술처는 이와 함께 통폐합 연구기관 소관 부처의 장인 동력자원부 장관, 체신부 장관, 상공부 장관, 재무부 장관 등과 예산을 총괄하는 경제기획원 장관의 협조 서명을 받았다. 이어 대통령 비서실장 협조 서명과 남덕우 국무총리 결재도 받았다.
당시 과학기술처 실무 관계자 A씨의 말이다. “당시 각 부처 협의 과정에서 큰 이견이나 갈등은 없었습니다. 이미 국보위 경과분과위원회에서 연구소 실태를 점검해 통폐합 원칙을 정했고, 전두환 대통령도 이런 방침을 밝힌 바 있습니다. 또 국보위 경과위원장 김재익 박사가 청와대 경제수석이어서 부처에서 뒤늦게 이견을 제기하기 어려웠습니다.”
남덕우 국무총리는 대통령 재가 후 해당 부처에 공문을 보내 통폐합 업무를 차질 없이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지시 공문을 받은 부처는 경제기획원 장관, 재무부 장관, 상공부 장관, 체신부 장관, 동력자원부 장관과 정부 조직을 담당하는 총무처 장관 등이었다. 남 총리는 이 공문에서 “정부가 확정한 이공계 연구기관의 '연구개발 체제 정비와 운영 개선 방안'에 대해 해당 부처는 연구 능률 극대화를 위해 적극 협조하기 바란다”면서 “각 부처는 산하 이공계 출연연구기관을 과학기술처에 조속히 이관 조치하라“고 지시했다.
과학기술처는 연구소 통합에 따른 관련 법령을 제정해서 부처 협의와 경제부처 장관 회의, 국무회의, 입법 회의를 거쳐 전두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연구기관 통폐합 업무는 과학기술처 과학기술심의실에서 총괄했다.
통합 연구기관들도 서둘러 재단법인 설립에 착수했다. 그 가운데 한국과학기술계의 양대 산맥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한국과학원의 통합은 정부 발표 이전부터 기정사실인 일이었다.
국보위에서 정부출연연구기관 통합 방침을 결정할 무렵인 1980년 8월 20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과학원, 한국과학재단(현 한국연구재단)은 이날 오후 이사회를 열고 이정오 한국과학원 교수를 기술연구소장·과학원장·이사장에 선임했다. 3개 기관장 겸직은 과학기술계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정오 당시 원장은 기자들과 만나 “고급 과학기술 인력 양성과 연구개발을 병행하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통합체제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이 같은 발언은 정부와 사전 교감 없이 언급할 수는 없는 중대 사안이었다. 이 발언으로 과학기술계의 주목을 받던 이정오 원장은 취임 10여 일 후인 9월 3일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전격 발탁됐다. 이 장관은 한동안 이들 기관장직을 겸했다.
그해 11월 8일 오전.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한국과학원은 각각 이사회를 열고 소장 및 원장에 이주천 한국과학원 교수를 선임했다. 이주천 교수는 서울대 문리대학 물리학과 졸업과 동 대학원을 수료하고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대학원에서 고체물리학을 연구해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캐나다 몬트리올대 교수로 재직하다 1975년에 귀국한 해외유치 과학자 1세대다. 그는 한국과학원에서 교수와 부원장을 지냈다.
이주천 원장은 정부가 연구기관 통폐합 방침을 발표한 며칠 후인 11월 19일 기자들과 만나 앞으로 통합운영 구상 등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이 원장은 “한국과학원과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두 기관의 특성을 살려 가면서 고급 과학기술 두뇌 양성, 고급기술 축적, 연구 능력을 배양하는 방향으로 통합 운영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통합은 기구 축소가 아니라 발전적 개편”이라면서 “두 기관의 인력과 시설을 최대한 활용해 산·학 수탁 연구는 계속하고 중장기 개발계획에 따라 기술 연구에 주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원장은 “통합기관은 과거 보직 중심에서 벗어나 연구인 중심으로 운영해 연구 분위기 조성에 힘쓰겠으며, 연구 평가제도를 확립해 연구 결과에 따라 대우하고 연구비도 배정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등 연구 풍토 조성에 주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원장은 “앞으로 한국과학원은 박사 양성 기관으로 그 기능을 강화해서 효율적인 과학기술 두뇌 양성에 주력하고,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산업현장에서 발생하는 기술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국가 연구과제와 기술 축적을 위한 기초연구 위주로 운영하겠다”면서 “통합작업에 따른 기구 변동은 없다”고 말했다.
두 기관의 '한 지붕 두 가족' 생활은 출발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1966년 2월 2일 한국과학 기술 개발의 산실로 출범했다.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받고 독립채산제, 계약연구제 등을 도입해 한국 과학기술연구계를 선도했다. 한국과학원은 1970년 8월 7일 과학기술 인재 양성기관으로 발족했다. 학비 면제와 장학금 지급, 기숙사 제공에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병역 특례까지 학생들에게 제공했다. 두 기관 설립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이 뒤따랐다.
이처럼 설립 배경과 기능이 다른 두 기관을 하나로 통합했으니 내부 파열음은 필연이었다. 당장 기관 명칭을 놓고 양측이 대립각을 세웠다. 과학원 교수들은 '한국과학원'이란 명칭을 고수했다. 반면에 기술연구소 연구원들은 설립 배경이나 대외 인지도 등을 감안할 때 '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로 양보 없는 팽팽한 대치 상황이 한동안 계속했다.
이런 가운데 몇 명의 교수들이 중재안을 제시했다. 한국과학기술원 변명섭 전 행정처장의 회고. “중재안은 한국과학원에 '기술'을 넣고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연구소'를 빼 한국과학기술원으로 하자는 안이었다. 양측의 동의 과정을 거쳐 명칭을 한국과학기술원으로 결정했다. 이때 영문 표기도 KAIST로 정했다.”
그러나 이 같은 내분은 시작일 뿐 끝이 아니었다. 충돌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