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기고] 해외로 빠져나간 5조원, 가상자산 규제의 역설

정구태 인피닛블록 대표
정구태 인피닛블록 대표

작년 한 해 국내 가상자산 투자자들이 해외 주요 거래소에 지급한 거래 수수료가 약 5조원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업비트, 빗썸 등 국내 5대 거래소의 전체 영업수익 1.8조원의 약 3배에 가까운 규모다. 이 수치는 국내 가상자산 산업의 경쟁력이 얼마나 빠르게 해외로 이전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지표다. 업계에서 “사실상 국내 최대 거래소는 해외에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현상을 투자자들의 규제 회피나 투기 성향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비켜간다. 자본은 언제나 더 나은 상품과 더 효율적인 시장을 향해 이동한다. 가상자산 산업 역시 자본주의 원리 위에서 작동한다. 자본주의는 위험을 없애는 체제가 아니라, 위험을 가격에 반영하고 경쟁을 통해 효율을 높이는 구조다. 국내 투자자들이 해외 거래소를 선택하는 이유 역시 접근 가능한 상품의 폭과 거래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현재 국내 가상자산 규제 체계는 가상자산사업자(VASP)라는 단일 범주로 묶어 일괄 규제하는 방식에 머물러 있다. 이 구조는 관리·감독의 편의성은 높일 수 있으나, 각 사업자의 역할과 위험 구조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특히 거래소의 경우, 본연의 기능과 금융적 확장 기능을 구분하지 않은 채 동일한 규제를 적용하는 것은 산업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거래소가 고객 자산을 활용해 직접 대여, 운용, 결제 등과 같은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이해상충과 시스템 리스크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엄격한 규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해외 거래소와의 경쟁과 직결되는 기능까지 과도하게 제한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현재 국내에서는 선물과 옵션 등 파생상품 거래가 사실상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글로벌 유수 거래소와 동일 선상에서 경쟁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어렵다. 그 결과, 고급 기관 투자 수요와 5조원에 가까운 막대한 수수료가 자연스럽게 해외 거래소로 빠져나간다.

규제의 목적이 투자자 보호와 시장 안정이라면, 수요를 차단하는 방식이 아니라 제도권 안에서 관리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이미 존재하는 파생상품 수요를 외면한 채 금지 일변도로만 유지하는 것은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해외로의 회피를 유도하는 선택에 가깝다. 일정한 자본 요건과 내부통제, 리스크 관리 기준을 충족한 거래소에 한해 단계적으로 파생상품 확장과 레버리지 허용을 검토하는 방안은 충분히 논의할 가치가 있다. 거래소가 국내 수탁업자, 지갑업자 등과 밥그릇 싸움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해외 유수 거래소들과 경쟁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이 뒷받침돼야 한다. 자본력과 기술력, 리스크 관리 능력을 갖춘 사업자에게는 더 넓은 사업 범위를 허용하고, 그에 상응하는 엄중한 책임을 부과하는 차등 규제가 합리적이다.

나아가 이러한 경쟁 체계는 국내 수요를 지키는 데서만 그치지 않는다. 글로벌 기준에 부합하는 거래 환경을 갖춘다면, 해외 투자자와 외국인 자금 역시 한국 시장으로 유입될 수 있다. 가상자산 시장에서 국경을 넘는 경쟁은 이미 현실이다. 규제의 울타리 안에만 머무는 시장은 보호되는 것이 아니라 고립된다.

전 세계적으로도 가상자산 산업은 더 이상 비주류가 아니다. 거래소를 포함한 산업의 핵심 인프라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시장 성장 경로와 국가 경쟁력이 좌우된다. 이제는 국내 사업자들끼리만 다투는 일괄 규제에서 벗어나 국제 경쟁력을 고려한 역할과 기능 규제로 전환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경쟁 원리를 제도적으로 활용할 때, 비로소 국익이 완성된다.

정구태 인피닛블록 대표 kevin@inbl.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