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계약 조건보다 확보가 우선…메모리 제조사 '슈퍼 을' 됐다

AI 열풍에 HBM 품귀현상
일반 D램 라인까지 축소
메모리 '파운드리화' 변곡점
기성품→수주형 특수품 격상
계약조건보다 제품 확보 우선
초단기 계약·전액 현금 선지불

[이슈분석]계약 조건보다 확보가 우선…메모리 제조사 '슈퍼 을' 됐다

메모리 시장 주도권이 제조사로 완전히 넘어갔다. 인공지능(AI) 열풍이 불러온 고대역폭메모리(HBM) 품귀 현상이 일반 D램 공급망까지 흔들면서, 수십 년간 유지된 '안정적 고정가' 질서가 붕괴하고 있다.단순히 메모리 공급 가격 상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객사가 제조사의 파격적인 변칙 조건도 전적으로 수용하는 '슈퍼 을' 시대가 도래했다.

◇HBM이 삼킨 생산라인… 범용 D램의 '희소 자원화'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등 메모리 반도체 3사는 최근 글로벌 빅테크 고객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형태의 제품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기존 메모리 시장은 표준화된 제품을 대량 생산해 파는 '기성품(Commodity)' 시장이기 때문에 가격 선확정이 원칙이었다. 제조사는 재고 관리의 안정성을, 고객사는 예산의 예측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분기 및 연간 단위 고정거래(Fixed Price) 계약을 맺었으며, 시황에 따른 가격 변동 폭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메모리 제조사 주도의 '판매자 우위 시장'으로 완연히 전환되면서, 고객사들은 물량 확보를 위해 전례 없는 불리한 계약 조건을 수용하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의 지위가 '기성품'에서 고객의 전략적 확보가 필수적인 '수주형 특수품'으로 격상되고 있는 것이다.

기성품은 제조사가 선제적으로 물량을 대량 생산해 시장에 공급하는 '푸시(Push)' 방식이 주를 이룬다.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 확대로 일반 D램 라인이 축소되면서 이제는 고객사가 제조사의 배정을 기다려야 하는 '풀(Pull)' 방식으로 시장의 판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일부 빅테크 기업은 물량 배정을 우선 확약받기 위해 계약 대금 전액을 현금으로 선지불하는 등 메모리 선매수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이처럼 글로벌 빅테크들이 현금을 선지불하거나 사후 정산 조항을 수용하는 것은 제조사의 막대한 설비 투자 리스크를 고객사가 공동으로 짊어지는 수주 산업 특유의 구조가 반영된 결과다. 이는 메모리 산업이 사실상 '파운드리(위탁생산)화'되는 변곡점에 들어섰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파격적인 계약 조건이 등장한 배경에는 HBM 생산 확대에 따른 '범용 D램의 증발'이 자리 잡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주요 제조사가 수익성이 압도적인 HBM에 생산 능력을 총동원하면서, 서버와 스마트폰, PC에 들어가는 일반 D램을 생산할 웨이퍼 할당량이 급격히 위축됐기 때문이다.

HBM은 일반 D램보다 칩 크기가 2배 이상 크고 공정 난도가 높아, 동일한 웨이퍼를 투입해도 생산량은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제조사들이 AI 서버용 HBM 공급에 집중할수록 일반 메모리 시장은 '물리적 공급 부족'이라는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실제로 최근 북미와 유럽의 주요 데이터센터 기업 관계자들은 메모리 물량 배정을 확약받기 위해 한국 제조사 본사를 직접 방문, 긴급 공급 협상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SK하이닉스 HBM4 . 이동근기자 foto@etnews.com
SK하이닉스 HBM4 . 이동근기자 foto@etnews.com

◇ “부르는 게 값”... 초단기 계약·사후정산 등 '변칙 조건' 속출

공급 우위 시장이 형성되자 메모리 제조사들은 시장 상황에 즉각 대응하기 위해 기존의 긴 호흡을 가진 계약 대신 '신개념' 계약 조건을 내걸고 있다.

삼성전자는 시장 가격 변동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위해 '초단기 계약'을 주도하고 있다. 시황이 급변하는 시기에 연간 계약으로 가격을 묶어두는 대신, 수시로 가격을 재협상해 수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이다.

마이크론 역시 글로벌 스마트폰 제조사를 대상으로 모바일용 LPDDR D램 가격을 기존 대비 70~80% 인상된 수준으로 공급하면서, 향후 시세가 추가로 오를 경우 차액을 나중에 지급받는 '사후 정산' 조항을 삽입했다. SK하이닉스 또한 북미 대형 클라우드 서비스 공급사(CSP)와 유사한 형태의 특약이 포함된 공급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 빅테크 고객사는 물량 확보를 위해 초기 계약 금액 전체를 현금으로 선지불하는 등 제조사의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기업용 시장의 열기는 소비자 및 유통 시장으로도 전이되고 있다. 소비자용 메모리 가격이 연일 고점을 경신하면서 유통업체들은 제조사가 요구하는 까다로운 배정 조건을 맞추느라 애를 먹고 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제조사가 요구하는 조건이 사실상 독소조항에 가깝더라도 물량을 배정받는 것 자체가 이익인 상황”이라고 전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메모리 가격은 이미 전 분기 대비 두 배 가까이 폭등하며 시장 전망치를 웃돌고 있다. 전문가들은 AI 인프라 투자가 정점에 달하는 올해 하반기까지는 이러한 제조사 절대 우위의 기조가 꺾이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이러한 '슈퍼 사이클' 이면의 그림자도 짙다. 공급 부족이 심화되면서 올해 완제품(세트) 시장의 타격도 가시화될 전망이다. 메모리 가격의 비정상적인 폭등은 결국 스마트폰, 서버 등 완제품(세트) 업체들의 원가 부담을 한계치까지 밀어붙이고 있다. 수익성 악화와 절대적인 물량 부족이 겹치면서, 스마트폰이나 PC 제조사들이 올해 출하량 목표치를 하향 조정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하반기 메모리 수요 정점 이후 빅테크들이 AI 인프라 투자 속도를 조절할 가능성도 있다. 소비자향 AI 서비스가 수익 창출 여부가 불확실하다는 의구심 때문이다. 이 경우 제조사가 내세운 파격적인 계약 조건들은 역설적으로 재고 급증과 가격 폭락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우려도 제기된다.

이형두 기자 dud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