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AI 반도체의 핵심, 첨단 패키징 소재

최근 반도체 산업의 화두는 바로 '경쟁의 무대가 이동했다'는 사실이다. 한동안 승부는 더 미세한 공정, 더 많은 트랜지스터에 있었다. 하지만 인공지능(AI) 시대에 들어서면서 성능 병목은 점점 '칩 밖'에서 발생하고 있다. 연산을 담당하는 로직과 데이터를 공급하는 메모리를 얼마나 가까이, 넓은 대역폭으로, 안정적으로 묶어내는지가 시스템 성능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최첨단 칩을 확보해도 패키징 단계에서 수율이 무너지면 출하량이 급감한다. 성능이 높아질수록 전력과 열, 고주파 신호, 전자파 간섭(EMI), 심지어 일부 응용에서는 방사선 환경까지 고려해야 한다. 여기서 AI 반도체는 단순한 전자부품이 아니라 고열·고응력·고주파 조건을 동시에 버티는 '복합 구조물'이 됐다.

AI 반도체 기술은 AI 가속기와 고대역폭 메모리(HBM) 기반의 그래픽처리장치(GPU)로 대표되고 극단의 조건을 요구한다. 단지 빠른 것만이 아닌 고전력·고열 환경에서도 신호 무결성을 유지해야 하고 동시에 조립·검사·재작업까지 가능한 양산 체계를 갖춰야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술로 칩렛, 2.5D·3D 적층 같은 이종집적 구조가 부상하면서 무어의 법칙을 반도체 패키징 차원에서 이어가려는 시도로 연결되고 있다. 칩 제조공정 미세화만큼이나 칩을 더 정교하게 얹고 연결하는 방식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유리·세라믹 등 새로운 기판과 공정 조합이 거론되는 배경도 마찬가지다. 더 높은 집적도와 더 미세한 배선, 더 낮은 신호 손실, 더 큰 면적을 가진 칩셋의 구현이라는 조건을 동시에 만족해야 하는 요구도 점점 커지고 있다.

그래서 최근 핵심 키워드는 '전력 밀도'다. 더 집적화된 반도체 패키징 구조에 의해 전력이 작은 면적에 집중되면서 단위 면적당 열(열유속)이 급증하고 열이 빠져나갈 경로가 상대적으로 좁아지는 게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머리카락보다 더 촘촘한 40~55㎛ 수준 미세 피치 접합 공정에서는 미세한 공정 편차만으로도 워페이지(뒤틀림), 미세 단선, 보이드와 같은 결함이 수율 하락으로 직결되기 쉽다.

여기에 방열을 위한 솔더링 등 245~260℃ 수준의 고온 접합 구간이 더해지면 기판과 부품에 누적되는 열 스트레스도 커진다. 구조가 복잡할수록 결함이 발생하는 지점은 기하급수로 늘어나고 작은 균열 하나가 수율을 흔들게 되면 공급 또한 흔들린다. 좋은 설계가 나쁜 수율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이러한 물리적 한계를 버텨줄 소재의 뒷받침이 필수다.

결국 첨단 패키징은 '조립 기술'이 아닌 '물성 설계'의 문제로 이어진다. 열을 얼마나 빨리 빼낼 것인가, 열팽창 차이로 생기는 응력을 어떻게 흡수할 것인가, 고주파 환경에서 신호 손실을 줄이면서 신호 무결성을 어디까지 확보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그 성능을 양산 수율로 끝까지 지킬 수 있는가다.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곧 AI 반도체의 실전 성능이 된다. 그 답을 실제 구현하는 손잡이가 바로 언더필, 다기능 에폭시 몰딩 컴파운드(EMC), 유리기판용 TGV(미세한 구멍을 통해 신호 또는 전기를 상호 연결하는 기술) 급속 배선, 저온 솔더와 같은 패키징 소재다.

첨단 소재는 단순한 부품·소모재가 아니라 데이터센터 가동률과 효율, 장애 리스크를 좌우하는 인프라 기술로 부상했다. 패키지·모듈 레벨에서의 열·신호·기계 신뢰성 문제가 성능 저하(스로틀링), 교체·다운타임 증가, 공급 제약 같은 경로로 증폭되며 결국 국가 디지털 인프라로서의 데이터센터 운영의 안정성과 경쟁력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한 공급망 불안과 수출 통제, 지정학적 변수는 핵심 소재의 조달 리스크를 상시화했다. 이제 필요한 건 단순한 국산화가 아닌 패키징과 모듈의 '열·전기·기계적 통합 최적화'를 이끌 핵심 소재의 전략적 자립과 고도화다.

반도체의 성능 향상 한계와 한계 극복 반도체 패키징 소재 솔루션 도식도.
반도체의 성능 향상 한계와 한계 극복 반도체 패키징 소재 솔루션 도식도.

우리가 확보해야 할 핵심 소재의 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언더필용 절연 고방열 소재다. 패키지 내부에서 전기적 절연과 열전도, 계면 신뢰성은 동시에 달성해야 한다. 미세 피치로 갈수록 계면 결함 하나가 치명적이기 때문에 소재의 흐름성·경화 거동·열전달 특성의 균형이 중요해진다.

둘째, 방열·전자파·방사선 다기능 EMC 소재다. 봉지재는 단순 보호재가 아니라 열과 전자파, 환경 스트레스를 함께 제어하는 기능성 소재로 진화하고 있다. 특히 고출력 모듈에서 EMC의 물성 편차는 수율과 장기 신뢰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셋째, 미세 피치 TGV 대응 금속 배선 소재다. 유리 기판 기반 배선은 고주파 특성과 치수 안정성에서 매력적이지만 미세 비아·배선 구현, 계면 접착, 전기적 신뢰성 확보가 핵심 난제다. 결국 이를 뒷받침하는 금속 소재와 도금·증착·후처리 기술이 산업 적용의 관문이 된다.

넷째, 고신뢰성·저온 금속접합(솔더) 소재다. 저온 접합은 칩과 기판에 가해지는 열 스트레스를 줄여 공정 창을 넓히고 리워크 가능성까지 제공한다. 그러나 저온이라는 장점이 장기 신뢰성 저하로 이어지지 않게 하려면 합금 설계, 계면 반응 제어, 열 피로 내성 확보가 동반돼야 한다.

이 네 가지는 서로 다른 소재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하나다. 데이터센터와 AI 시스템이 요구하는 '고집적·고출력·고신뢰성' 환경을 버티게 만드는 기반 기술이라는 점이다. 이 기반 기술은 단기간에 완성되지 않는다. 설계-제조-평가-인증이 한 세트로 돌아가며 고객 요구 조건이 빠르게 변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 차원의 해법은 명확해야 할 것이다. 첫째, 공공이 중심이 돼 '실증과 신뢰성 평가' 인프라를 갖춰야 한다. 기업이 단기간 제품화에 집중하는 동안 국가는 장기적 관점에서 공통 기반을 제공해야 한다. 열 저항 평가, 고주파 특성, 전자파 간섭(EMI) 내성, 패키지 워페이지, 열사이클·습열·충격 등 신뢰성 시험은 물론 특정 응용에서는 방사선 환경에서의 열화 평가까지 포괄하는 플랫폼이 필요하다. 평가 기반이 있어야 설계 지침이 나오고, 설계 지침이 있어야 인증이 가능하며, 인증이 있어야 시장에 진입할 수 있다.

둘째, AI를 소재 개발 프로세스의 중심으로 끌어와야 한다. 'AI 칩을 위해 AI로 소재를 만든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고방열·다기능 소재는 조성 변수와 공정 변수가 방대하고 실험만으로 최적 솔루션을 찾기 어렵다. 멀티모달 데이터 기반의 예측 모델, 슈퍼컴퓨팅 시뮬레이션, 자율 실험 시스템을 결합하면 개발 속도와 성공 확률을 동시에 높일 수 있다. 중요한 건 개별 기관의 시도가 아니라 국가 차원의 데이터 표준과 공유 체계다. 데이터가 쌓여야 모델이 강해지고 모델이 강해져야 산업 전체가 빨라진다.

셋째, 공급망 관점에서 전략기술 지정을 검토해야 한다. 첨단 패키징 소재는 단순 원재료가 아니라 방산·우주·원자력·통신 등 전략 산업과 직결되는 핵심 자산이다. 조달이 막히면 제품 개발이 멈추고 산업 생태계가 흔들린다. 기술 유출 방지, 투자 우선순위 부여, 전문 인력의 장기 성, 실증 인프라의 국가 자산화가 함께 논의돼야 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전문 인재가 필요하다. 이 분야는 재료·화학·기계·전자·전산이 한데 얽힌 전형적인 융합 영역이다. 현장형 인력을 키우려면 실증 데이터 기반의 교육, 실제 패키지·모듈 평가 경험, 산업체 연계 프로젝트가 필수다. 국가연구기관은 장기 과제와 함께 인재의 성장 경로를 설계할 책임이 있다.

AI 시대의 승부처는 더 빠른 연산만이 아니다. 더 뜨거운 시스템을 더 안정적으로, 더 오래, 더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나라가 이긴다. 그 경쟁의 밑바닥에서 열과 간섭, 신뢰성을 다루는 것은 결국 '소재'다. 공공이 기반을 만들고 민간이 제품을 만들고 학계가 인재와 원천을 공급하는 선순환 구조를 갖춘다면 대한민국은 AI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시대의 추격자가 아니라 '글로벌 스탠다드'로 도약할 수 있다. 지금은 과감한 선택과 흔들리지 않는 장기 전략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최철진 한국재료연구원(KIMS) 원장

최철진 한국재료연구원 원장.
최철진 한국재료연구원 원장.

〈필자〉 1961년생으로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재료공학 석·박사를 받았다. 1986년 한국재료연구원에 입사해 나노분말재료그룹장, 나노기능분말연구그룹장, 분말.세라믹연구본부장 등을 수행했다. 2024년 한국재료연구원 제7대 원장에 취임했다. 국가과학기술자문(심의)회의 기계.소재 전문분과 위원장, 한국과학기술총연합회 이사, 대한금속재료학회 부회장직을 맡았다. 2024년 과학기술 훈장, 2016년 국무총리 표창, 2014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상, 2010년 산업기술연구회 이사장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