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일(현지시간)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칼을 빼든 '무역법 301조' 조사의 핵심 명분은 주요국의 제조업 부문 '구조적 과잉생산'이다. 미국은 이들 국가의 행위나 정책이 불합리하거나 차별적이며 미국 상업에 부담을 주거나 제한을 가한다고 보고 있다. 특히 미국은 이번 조사 과정에서 우리의 대규모 대미 무역 흑자를 정조준하며 이를 불공정한 시장 교란의 결과물로 규정하는 프레임을 짜고 있다.
◇목표는 상호관세 복원
USTR는 이날 301조 조사를 알리는 관보 공지문에서 “주요 무역 상대국들은 국내 및 세계 수요와 동떨어진 생산능력을 발전시켜 왔다”며 과잉 생산이 이들 국가의 무역 흑자, 즉 미국의 무역 적자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알루미늄, 자동차, 배터리, 시멘트, 화학, 전자, 에너지 제품, 유리, 기계, 비철금속, 종이, 플라스틱, 가공식품 및 음료, 로봇, 위성, 반도체, 선박, 태양광 모듈, 철강, 운송 장비 등을 과잉 생산 분야로 열거했다. 조사 대상국들이 이들 산업을 중심으로 필요 이상 생산한 탓에 세계 무역 불균형과 경제적 비효율이 초래됐고, 미국 산업 생태계와 고용 시장이 피해를 받고 있다는 주장이다.
정부는 이와 관련 무차별적 확전을 경계하고 있다. 여한구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은 긴급 브리핑에서 “이번 조사는 글로벌 구조적 요인을 조사하는 것으로 한국만이 타깃이 아니다”라며 “쿠팡 등 디지털 비관세 장벽 이슈와도 전혀 무관한 별개의 사안”이라고 일각의 우려에 선을 그었다.
핵심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상호관세 부활이다. 여 본부장은 “미국의 목표는 대법원 위헌 결정 이전의 관세 수준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미국은 사전 조사가 필요 없는 무역법 122조를 통해 150일 한시로 '10% 글로벌 관세'를 매겨둔 상태다. 이 5개월의 공백기 동안 301조 조사를 속전속결로 마친 뒤, 오는 7월 중순부터는 이전의 상호관세율을 합법적으로 재적용하겠다는 계산이다. 우리나라는 작년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15%의 상호관세율을 확정한 바 있다.
이는 무역확장법 232조(국가안보 위협)에 따라 이미 고율의 관세(자동차 25%, 철강 50% 등)가 부과된 특정 품목과는 별개로 진행되는 조치다. 즉, 232조의 적용을 받는 품목들을 제외하고 한미 관세합의 당시 15%의 상호관세가 적용됐던 나머지 대다수 품목에 대해 기존 관세율을 되살리기 위한 법적 징검다리 성격이라는 설명이다.
◇美에 흑자내면 '과잉생산'?
USTR은 연방 관보 게재 전 우리 정부에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알렸다. 공식 협의도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한국의 대미 무역흑자 규모(2024년 기준 약 560억 달러)를 문제 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정 국가의 개입이나 보조금 정책 등으로 억눌린 생산 단가가 글로벌 시장에 '밀어내기 수출'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것이 미국 제조업 기반을 갉아먹고 있다는 논리다.
우리 기업이 압도적인 경쟁력을 바탕으로 미국 시장 점유율을 높여가는 상황 자체를 '과잉생산에 따른 불공정 무역'으로 엮어, 언제든 수입 제한이나 위반 품목에 대한 관세 인상을 때릴 수 있는 명분을 축적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에 정부는 통계와 팩트를 앞세운 논리로 정면 돌파에 나선다. 단순히 흑자 규모만 보고 이런 조치를 내리는 것은 미국 국익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파고든다는 계획이다.
여 본부장은 “한국의 대미 무역흑자는 우리 기업들이 최근 몇 년간 미국 현지에 대규모 공장을 짓고 투자를 단행하면서, 여기에 필요한 중간재나 부품 수출이 급증한 데 따른 착시현상”이라고 미국 측 주장을 일축했다. 배터리 원료나 자동차 부품을 미국 현지 공장으로 실어 나른 결과물이 단순 무역 흑자로 잡혔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결과적으로 한국의 대미 투자가 미국 제조업 부흥과 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향후 조사 및 협의 과정에서 결국 미국 경제와 제조업 재건에 오히려 우리가 도움을 주는 부분이란 것을 적극 설득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특히 일각에서 제기되는 대미투자 회의론에 대해서도 양국 간 '신뢰 유지'가 최우선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여 본부장은 “기존 미국과의 합의 내용을 무시하고 다른 방향으로 나가는 국가가 있다면, 기존 관세(15%) 복원이 아니라 관세가 더 인상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면서 “한미관계 안정성을 회복할 수 있는 첫 번째 발걸음은 합의했던 내용을 신의성실하게 이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안영국 기자 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