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선박 호르무즈 통과 난항…“정유사 지분·거래 등 美와 상당수 얽혀 있어”

사이드 쿠제치 주한이란대사. 사진=연합뉴스
사이드 쿠제치 주한이란대사. 사진=연합뉴스

미국과 이란 간 충돌이 격화되는 가운데, 이란이 사실상 '조건부 봉쇄'에 가까운 기준을 내세우면서 한국 선박의 호르무즈 해협 통항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주한 이란대사 사이드 쿠제치 는 26일 CBS 라디오에 출연해 “한국 선박의 제원 정보를 사전에 제공받아 이란 군과 관계 당국이 검토한 뒤 통과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 선박의 통과를 전면 금지하지는 않지만, 사전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다만 핵심 조건은 '미국과의 연관성'이다. 쿠제치 대사는 “미국 및 이스라엘과 관련된 모든 대상에 대해서는 해협 통과를 허용하지 않는다”며 “미국 기업과 거래하거나 미국 자본이 투자된 유전 및 에너지 시설을 이용하는 경우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이어 “전시 상황에서 미국 기업과 연결된 경제 활동은 제재 대상”이라며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란은 앞서 국제해사기구(IMO) 회원국에 '비적대적 선박'에 한해 사전 조율을 거치면 해협 통과를 허용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실제로 중국과 인도 등 일부 국가는 이란과 협의를 통해 통과에 성공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미국과의 경제적 연결성이 높은 국가 선박은 예외 없이 제한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한국은 협상 난도가 높은 상황이다.

국내 정유·에너지 산업 구조도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GS칼텍스 는 미국 셰브론 이 지분 50%를 보유하고 있으며, 에쓰오일 과 HD현대오일뱅크 역시 사우디 아람코 와 투자 관계를 맺고 있다. 이란이 미국과의 직·간접적 연관성을 폭넓게 해석할 경우 국내 선박 상당수가 통과 제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또 대한석유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SK에너지, GS칼텍스,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4사의 수출액 407억1500만달러 중 미국으로 향한 것이 43억3900만달러로 전체의 10.2%를 차지했다.

현재 해협에는 한국 국적 선박 26척이 머물러 있으며, 한국인 선원 178명이 탑승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해양수산부는 글로벌 해운 구조상 특정 선박의 미국 연관성을 개별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입장으로, 단기간 내 문제 해결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는 신중한 대응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외교부는 “이란 측이 구체적인 통과 조건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며 “중동 정세를 주시하면서 우리 국민 보호와 에너지 수송로 안전 확보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쿠제치 대사는 미국이 동맹국에 호르무즈 해협 통항 지원을 요청하는 데 대해서도 경고 메시지를 냈다. 그는 “한국이 이 사태에 동참해 실패의 공범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며 “위기를 초래한 당사자가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단기적인 해상 통제에 그치지 않고, 전쟁 이후에도 해협 통항 질서 자체를 바꿀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중동 지역 긴장이 장기화될 경우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과 해상 물류에도 상당한 충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상목 기자 mrls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