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 기후금융의 정체, 이제는 '생산적 금융'으로 풀어야 한다

이승우 한화생명금융서비스 재무전략실장(전무·기후에너지정책학 박사)
이승우 한화생명금융서비스 재무전략실장(전무·기후에너지정책학 박사)

지금 글로벌 금융시장의 가장 큰 역설은 분명하다. 기후위기의 심각성은 커지고 있지만, 이를 해결할 자금의 흐름은 오히려 둔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탄소중립이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데 이견은 없지만, 현실의 금융시장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 안보가 부상한 데 이어 중동의 지정학적 불안까지 겹치면서, 각국의 정책 우선순위는 다시 안정과 생존으로 이동했다. 그 결과 기후 대응 투자와 금융은 후순위로 밀려나고 있다.

문제는 단순한 투자 위축이 아니다. 기후금융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탄소중립 경제로의 전환 자체가 어려워진다. 필자는 싱가포르에서 자산운용업을 수행하며 글로벌 기후금융 시장을 경험했고, 최근 투자자와 금융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설문과 심층 인터뷰를 통해 국내 시장을 점검했다. 결론은 분명했다. 한국의 기후금융은 지금 구조적 정체 국면에 들어서 있다.

국내 자금조달 구조를 고려할 때 기후금융의 핵심은 녹색채권 시장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발행 규모와 증가 속도는 뚜렷하게 둔화됐다. 글로벌 불확실성 속에 기업들은 비용이 수반되는 녹색 전환 투자에 신중해졌고, 녹색분류체계 강화로 적합한 프로젝트 발굴은 더 어려워졌다. 인증 비용과 절차 부담까지 커지면서 녹색채권 발행의 재무적 유인은 약화됐다. 일부 공기업을 제외하면 시장 참여가 위축된 배경이다. 투자 측면도 다르지 않다. 현재 녹색금융 상품은 투자자에게 위험 대비 수익 매력이 낮은 자산으로 인식된다. 공익성이 강조되더라도 수익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시장은 지속되기 어렵다. 결국 한국의 기후금융 시장은 발행기관과 투자기관 모두가 참여를 주저하는 이중 공백 구조에 놓여 있다.

이 정체를 돌파하려면 기후금융을 최근 정부가 강조하는 '생산적 금융'의 관점에서 재정의해야 한다. 생산적 금융은 자본이 단순 순환을 넘어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높이는 분야로 흐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후금융은 생산적 금융의 핵심 축이 돼야 한다. 재생에너지, 친환경 인프라, 탄소저감 기술은 비용이 아니라 미래 현금흐름을 창출하는 투자자산이기 때문이다. 이제 기후금융은 규제나 의무의 영역이 아니라, 수익성과 성장성을 함께 갖춘 투자 영역으로 인식돼야 한다.

시장 활성화의 관건은 유동성과 수익 구조의 동시 개선에 있다. 첫째, 세제 인센티브를 통해 투자자의 기대수익률을 보완해야 한다. 둘째, 연기금과 대형 기관투자자의 참여를 확대해 안정적 수요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셋째, 녹색국채 발행을 확대해 시장의 기준금리와 가격체계를 형성해야 한다. 국가는 초기 시장에서 앵커 발행자로서 유동성을 공급하고 글로벌 투자자 자금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또 하나 중요한 축은 전환금융이다. 모든 기업이 즉시 녹색 기준을 충족할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하면, 점진적 전환을 지원하는 금융 구조가 필요하다. 지속가능연계채권은 자금 사용처를 사전에 엄격히 제한하기보다 기업의 지속가능 목표 달성 여부를 기준으로 평가함으로써 보다 유연한 자금조달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기업 참여를 넓히고 기후금융 시장의 저변을 확대하는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

기후위기 대응의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 전환을 가능하게 할 자본을 어떻게 동원하느냐다. 한국 기후금융 시장이 다시 성장 궤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정책 의지만으로는 부족하다. 유동성과 수익성을 함께 확보하는 정교한 금융 설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분명하다. 기후금융을 규제가 아니라 생산적 금융의 핵심 축으로 인식하는 데 있다.

이승우 한화생명금융서비스 재무전략실장(전무·기후에너지정책학 박사) power@hanwh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