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자산통제국(OFAC)는 2021년 가상자산 업계를 위한 제재 준수 가이드를 발표하면서, 거래 상대방 식별, 지갑 주소 스크리닝, KYC, 지리정보 및 IP 분석, 거래 모니터링 등 가상자산 업계에 특화된 제재 준수 절차를 제시했다. 미국 규제당국은 암호화폐를 규제 바깥의 영역으로 방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 금융 수준의 제재 체계 안으로 편입시키려 했다.
이 원칙은 2026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재무부의 2026년 국가 자금세탁 위험평가 역시 여전히 2021년 OFAC 가이드와 관련 FAQ를 참고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세부 규정도 구체적이다. OFAC FAQ에 따르면, 미국인이 제재 대상과 관련된 가상자산을 보유하게 된 경우 이를 차단해야 하며, 10영업일 내 보고하고 이후 연례 보고도 해야 한다. 이는 디지털 자산이 제재 집행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상징적 규정이다. 블록체인 자산 역시 다른 형태의 재산과 마찬가지로 동결과 보고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 원칙은 2026년 현재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란 사례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첫째, 암호화폐는 분명 제재의 마찰 비용을 낮출 수 있다. SWIFT 접근이 막히고 달러 결제가 어려워질 때, 비트코인 채굴이나 디지털 자산 활용은 일부 거래를 이어가는 데 보조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란이 채굴을 산업화하고 암호화폐 결제를 시험한 사례는 이런 가능성을 보여준다. 둘째, 그러나 암호화폐는 제재를 완전히 무력화하지 못한다. 대규모 무역을 처리하려면 결국 법정통화와의 연결 고리가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은행, 브로커, 거래소, OTC 네트워크 등 규제와 제재 집행의 접점이 다시 등장한다. 또 주요 가상자산 사업자들은 OFAC를 비롯한 규제당국의 제재를 준수할 것을 요구를 받는다. 여기에 온체인 분석 기술까지 발전하면서, 과거보다 제재 회피 거래를 식별하기도 쉬워졌다. 블록체인은 제재를 끝내는 기술이라기보다, 제재 회피의 비용과 제재 집행의 정교함을 동시에 높이는 기술에 가깝다. OFAC의 2021년 가이드가 2026년에도 여전히 실무 기준으로 인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셋째, 이란 사례는 암호화폐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도 요구한다. 그것은 금융 포용의 문제다. 제재는 정부와 정권만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종종 일반 시민의 결제와 저축, 송금 능력까지 약화시킨다. 통화가치 불안, 인플레이션, 국제 금융망 차단이 겹치면 시민들은 대체 자산을 찾게 된다. 이 때 디지털 자산은 국가 차원의 우회 수단일 뿐 아니라, 개인에게는 가치 저장 수단이자 국경간 이전 수단으로도 기능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암호화폐의 위험을 지우는 것은 아니다. 불법 자금 이동, 자금세탁, 제재 회피, 사이버범죄 수익 이전과의 연결 가능성은 여전히 크다. 중요한 것은 암호화폐를 선악의 단순한 이분법으로 재단하기보다, 제재 환경 속에서 국가와 개인이 각각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분리해 보는 일이다.
결국 핵심 질문은 금지냐 허용이냐가 아니다. 더 정확한 질문은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관리할 것인가에 가깝다. 전면 금지는 실효성이 낮을 가능성이 크다. 네트워크는 국경을 넘고, 사용자들은 탈중앙화 서비스나 해외 플랫폼으로 이동할 수 있다. 반대로 방치 역시 답이 아니다. 제재 회피, 자금세탁, 무장조직 자금조달, 사이버범죄 수익 이동과 연결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경로는 규제와 기술 감독의 병행이다. 즉, 합법적 사용 영역은 제도권으로 흡수하되, 거래소, 커스터디,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브리지, OTC 네트워크에는 촘촘한 제재 준수 의무를 부과하는 방향이다. 이런 점에서 암호화폐 정책은 금융혁신 정책인 동시에 외교·안보 정책의 성격도 함께 띤다. 이란 사태가 던지는 결론은 단순하지만 무겁다. 블록체인은 제재를 무효화하지 않는다. 다만 제재의 작동 방식을 바꾸고 있을 뿐이다. 국가는 더 많은 우회 경로를 찾고, 규제당국은 더 많은 데이터를 확보한다. 제재 대상국은 채굴, 디지털 자산 결제, 해외 거래소 이용, 비공식 네트워크 활용 등을 통해 숨통을 틔우려 하고, 미국과 동맹국은 OFAC 제재, 지갑 주소 차단, 거래소 규제, 온체인 포렌식을 통해 그 흐름을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암호화폐는 '자유의 기술'이나 '불법의 기술'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 지정학 속 금융 인프라의 일부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란은 그 변화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시험대 가운데 하나다.
김선미 동국대 경영전문대학원 핀테크&블록체인 책임교수